생사여탈권 쥔 성주에‘절대복종’ 뼛속까지 배어 웬만하면 참고 버티어내
“목숨 부지해야”… 봉건시대 ‘슬픈 생존본능’ 아직도 문 1: 일본 지하철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람들은?
답 1: 미국 사람들입니다.
문 2: 그렇다면 두 번째로 시끄러운 사람들은?
답 2: 중국 사람들입니다.
◇도쿄 순환선인 야마노테 선 내부에서 조용히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일본인들 모습. 일본 전철 내부는 청결할 뿐 아니라 조용하기로도 유명하다. 때문에, 목소리가 큰 외국인 관광객들이 전철에 탑승하게 되면 승객들의 주목을 받기 십상이다. |
‘개성’과 ‘자유’라는 스펙트럼을 놓고 볼 때, 최대치에 해당하는 오른편 끝에 위치해 있는 게 미국이라면 반대편인 왼쪽 끝에 자리잡은 국가가 일본이다. 어려서부터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며 자신감을 심어주는 곳이 미국이라면,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을 주변에 맞추도록 강제하는 곳이 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여행은 열대 지방과 한대 지역을 오가는 극한 체험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차이가 있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대상이 피부냐, 머리냐의 문제일 뿐. 그래서일까? 일본에 머무르다 미국으로 떠난 필자의 지인(知人)은 첫 몇 주간 “양국의 생활양식이 너무 달라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어디서나 조용하고 깨끗하며 모든 것이 감탄스러울 만큼 완벽하게 운영되는 일본을 떠나, 주변의 눈초리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자기 개성대로 마음껏 행동하는 미국에서 지상 최대의 문화 충격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냉탕에 있다가 곧바로 열탕에 들어간 느낌’이라는 지인의 경직된 몸이 미국에서 완전히 풀리기까지는 몇 주가 걸렸다는 후문(後聞)이다.
돌이켜 보면, 일본인의 수동적인 행동 양식은 그네들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의 정치체제가 한국·중국·베트남으로 연결되는 동-남아시아 벨트와는 판이하게 전개된 까닭에서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베트남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한 관료들이 국가를 운영했던 것과 달리, 지역의 맹주가 해당 지역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수백년간 쥐고 흔든 봉건 국가가 일본이다.
그러고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일본을 통일했다고 하나, 중앙집권적인 의미에서 전국을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지방 호족들의 기득권은 그대로 인정해 줌으로써 19세기 말 메이지유신 때까지 중세 유럽의 봉건제를 면면히 이어간 게 일본이란 얘기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전국 통일 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호족 간의 전쟁이 사라졌다는 것일 뿐, 한 지역의 호족은 여전히 자신의 터전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자연히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할 경우, 세습도 불가능해 지역의 통치 기반 전체가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손(孫)이 끊긴 지배계층이 고육지책으로 도입한 것이 바로 ‘입양’이었다. 우리의 입양이 사후(死後)에 공양받기 위한 인류학적 의미의 문화였던 데 반해, 일본의 입양은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형성된 생물학적 의미의 문화였던 셈이다.
◇일본의 3대 성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는 오사카 성의 천수각(天守閣) 전경. ‘토노사마’라고 불리는 영주가 해당 지역의 절대자로 군림하며 거주하던 ‘성(城)’은 봉건시대의 일본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열도의 백성들은 성주(城主)에 대한 절대복종을 생존양식으로 자연스레 익혀 나갔다. 만일, 백성들이 지역 맹주의 폭정에 항거해 중앙 정부에 탄원을 제기할 경우, 이들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대단히 가혹했다. 비록 중앙 정부가 직접 개입에 나서 지역 민원을 해결해 주기도 했으나, 위계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청원을 올린 이들은 모두 사형을 당해야만 했다.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핍박을 받게 되는 백성들은 중앙 정부에 청원서를 전달하기에 앞서, 자신들을 위해 죽어줄 지도자를 먼저 뽑아야 했다. 그렇게 마을을 위해 기름 가마에 들어가거나 교수형을 당해 죽는 탄원 주동자는 이후 농민들의 영웅이 되게 마련이었다. 실제로, 열도에서는 이렇듯 마을을 위해 살신성인한 의민(義民)들을 기리는 사당이 전국 곳곳에서 지금도 슬픈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죽을 정도로 몰리지 않을 경우, 웬만하면 참고 버티며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이 봉건제도 하의 일본인이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는 그런 중세 일본인들의 모습이 단순 명료하게 묘사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어느 해, 국민들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며 어느 정치인이 털어놓은 불만이 바로 그것. “우리 국민은 마치 봉건시대의 국민처럼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휘되었어야 할 전력이 지금도 발휘되지 않고 있습니다.”
해서, ‘겉 다르고 속 다른’ 일본인들의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모습)는 함부로 의중을 보일 경우, 목숨을 보장받기 어려운 봉건시대 일본인들의 슬픈 생존 본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기에 따라 위정자(爲政者)가 끊임없이 바뀌는 한국의 통치 문화는 할 말 못할 말 다하고 사는 한국적 기질을 탄생시킨 제도적 무대장치였다는 생각이다. 후임 사또를 겪어 보니 전임 사또가 좋은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우리 속담이 일본인들의 입장에선 더더욱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