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발전한다고 삶이 편안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속도에 대한 조급증에 빠질 수도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느리게 가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여행에서 눈으로 보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발만 찍고 오는 여행, 눈동자만 돌리고 오는 행동은 이제 ‘저리 가라’다. 일상을 벗어나고자 떠난 발걸음인데도 여행지에서까지 분주하다면 ‘떠남’의 의미는 반감된다. 어쩌다 생긴 기회라고 여행지에서 매번 서두른다면 일상과 다를 건 없다. 그래서 조용히 한 곳을 찾아 생각해보고, 음미해보고, 젖어보고,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절대로 욕심부리지 않고. 하루 일정이라면 한두 군데서, 하루 이상의 일정이라면 서너 군데서 아주 오래도록 자신을 놓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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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 산간 지방의 마을들은 도회지 사람에게나 오지마을이다. 개미들 마을로 불리는 정선의 낙동리만 하더라도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찾아 속 깊은 생각으로 사색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개미들 마을 앞을 흐르는 지장천이 충정의 상징인 백이산의 줄기만큼이나 푸르고 깊다. |
별칭인 개미들 마을의 유래가 재미있다. 조선 광해군 시절 관직을 사임하고 은거하던 한림학사 신일민이 이곳을 찾았다. 마을의 나무 그늘에 개미들이 몰려들어 좀처럼 자리에 앉을 수 없자 그는 ‘개미들 판’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마을에 개미가 많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개미처럼 부지런해서 의미는 제법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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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일바이크를 타면 산과 계곡에 이어 하늘과 철길, 터널을 동시에 볼 수 있다. |
트랙터 뒤에 앉아 마을을 본다. 마을 주변을 흐르는 지장천이 바닷물처럼 푸르고, 첩첩산중 계곡물처럼 시원해 보인다. 개미들 마을은 험준한 백이산(917m)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 그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학바위와 신랑바위, 각시바위가 냇가와 마을을 굽어보는 모양새가 한없이 여유롭다. 관음굴과 문두계곡 등 마을 역사를 전해주는 곳에 이르자, 마을 이장이 설명하느라고 바빠진다. 동행한 어떤 이는 이런 풍경에 “판소리 ‘적벽가’가 절로 나오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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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들 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인 ‘트랙터 풍경차’. 농사용이 아닌 풍경 감상용 트랙터를 타고 있으면 그 속도만큼이나 ‘느린 사색’이 가능하다. |
스스로 삶을 유폐했던 그들의 기개가 절벽만큼이나 푸르고 높았을 것이다. 망국의 한을 통곡한 충신들의 울음소리를 닮은 바람소리가 풍경차를 때리고 지나가는데, 죽비 소리처럼 서늘하다. 충절과 근면. 다양한 빛깔로 역사와 만남을 이어오던 개미들 마을을 지키는 이들은 36가구의 주민 96명이다. 시골마을치고 작지 않은 숫자다. 마을에 있는 조그만 초등학교 분교에는 학생이 한 명이다. 내년에 아이가 졸업하면 폐교된다.
그렇다고 낙망할 일은 아니다. 개미들 마을이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하는 체험마을로 입소문이 나면서 찾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수학여행을 이곳으로 온 학생들도 많다. 마을에서는 올해만 8000명을 기대하고 있다. 봄나물 채취와 떡메치기, 민물고기잡이 등 자연친화적인 체험이 인기를 끌고 있어서다. “수학여행의 대세는 경주가 아닌 개미들 마을”이라는 마을 주민의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마을로 통하는 길이 20년 전에 외나무 다리밖에 없었고 요사이도 마을을 오가는 정규 버스는 2대밖에 안 되지만, 단체 버스를 타고 오는 이들은 계속 늘어만 간다.
개미들 마을을 벗어나니 푸르고 맑은 정선의 다른 땅들이 반긴다. 한때 강원도의 깊은 산속 사람들에게 비행기는 자동차보다 더 익숙한 대상이었다. 찻길이 없어서 자동차는 볼 수 없지만, 비행기는 군용기라도 볼 수 있어서다. 강원도에서는 기차도 자동차보다 자주 보였다. 석탄 수요가 줄고 터널이 뚫리면서 이제 기차들도 그 본래의 기능을 잃게 됐다. 기차가 사람을 승객을 토해내고 물자를 토해냈던 역들도 의미가 줄어들었다. 폐광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이를 반대했고, 누군가는 기쁜 마음으로 떠났을 것이다.
길을 잃어야 새 길을 얻는다고 했던가. 폐쇄된 철로를 활용한 정선 지역의 레일바이크가 딱 그런 경우다. 철도(Rail)와 자전거(Bike)를 합친 레일바이크는 페달을 밟아 철길 위를 달리는 네 바퀴 자전거다. 정선의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7km가 넘는 구간을 페달로 밟으면 정선의 아름다운 풍광이 천천히 좌우로 지나간다. 이 풍광에 취한 것일까. 레일바이크는 보름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끈다고 한다. 레일바이크는 부족할지언정 과거와 현재, 고통과 낭만을 동시에 잇고 있다. 100만명이 다녀가며 이를 확인해줬다.
정선=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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