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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조롱 속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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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7-10 21:02:33 수정 : 2015-07-10 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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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짓는 것은 인격을 짓는 것이기에 늘 고독하고 힘든 일
글쓰는 공포에 맞서 밤을 밝히는 이들을 조롱하지 말아야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갑자기 뇌 회로가 뜨거워졌다. 연예인들이 세계 오지 정글을 찾아가 현지에서 먹거리를 찾는 그 예능프로그램 화면 하단에는 “정글에 온 지 하루 만에 맛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자막이 올라와 있었다.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표현이 여기저기서 패러디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직접 접하고 보니 참혹했다. 한국문학이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까지 조롱하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인가. 지나친 자괴라는 것 안다. 장르를 막론하고 ‘스캔들’은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필요한 것은 걸어온 자리와 지금의 자세를 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요즘은 누구나 글을 쓴다. 글을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이야기가 들린 지 오래다. 하루에도 수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길고 짧은 글들이 올라오고 장편소설 공모에는 300편 가까운 작품들이 어김없이 쏟아진다. 작가의 전문적인 글쓰기는 물론 장삼이사의 글쓰기까지 기본으로 관통하는 원칙이 따로 있을까. 상허 이태준(1904∼1969?)은 1940년대에 발간한 ‘문장강화’에 “작문이란 글을 짓는 것인 동시에 인격을 짓는 것”이라고 썼다. “작문은 사색하는 공부”이고 “사색은 인격의 공사(工事)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타인을 비방하거나 훔치거나 매장하는 글쓰기는 인터넷에 차고 넘친다.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말의 비수로 무차별 난자하는 글은 너무 많아서 그것이 오히려 일상화된 말, 혹은 정상적인 풍경으로 착각할 정도다.

‘문학’이라는 이름의 승화된 글쓰기라면 모범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정의 태도와 달라야 함은 물론이다. 미국인들이 ‘아버지’로 추앙하는 작가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1899∼1961)와 1년간 쿠바 바다에서 낚시를 거들며 작가수업을 받았던 아널드 새뮤얼슨의 ‘헤밍웨이의 작가수업’은 글쟁이들에게 많은 생각 거리를 준다. 헤밍웨이는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의 꿈을 키우는 새뮤얼슨에게 “어떤 예술에서고 낫게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훔쳐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 발언 뒤에는 곧바로 “남을 흉내 내지 말라”는 상반된 듯한 말도 덧붙인다. 문체란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라면서 “만일 남들처럼 쓰려고 한다면 자기만의 어색함뿐 아니라 다른 작가의 어색함도 아울러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쓴다는 일은 불가능했다. 문제는 얼마나 자신만의 문체로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느냐의 숙명일 터이다. 이 과정에서 유혹을 잘 견뎌야 한다. 이태준은 앞의 책에서 “제 글보다 전고(典故)에서 널리 남의 글을 잘 따다 채우는 것이, 과거 문장작법의 중요한 일문(一門)이었다”면서 “얼마나 자기를, 개성을 몰각한 그릇된 문장 정신인가”라고 꾸짖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헤밍웨이의 이런 충고도 인상적이다. “자네가 글을 쓴다고 하면 너도나도 행운을 빌어주겠지만, 자네가 잘나간다 싶으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 걸세. 정상에 머물 유일한 방법은 좋은 작품을 쓰는 거야.” 좋은 작품을 쓰고 싶지 않은 이 뉘 있겠는가. 헤밍웨이도 글을 쓰려고 앉아 있을 때마다 지독한 무력감에 빠진다고 했다. 그는 “글을 쓰는 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고 세상에서 못해먹을 짓인데 쉽다면 개나 소나 다 할 것”이라고 했다.

책상 앞에 앉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짓을 하는 것도 글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보았음직하다. 헤밍웨이는 투우 경기를 쫓아다니고 다른 짓거리를 수도 없이 한 것은 그게 글 쓰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박완서 선생도 생전에 마감을 앞두고 애꿎은 옷들을 다 꺼내 일일이 다시 개고, 쓸어놓은 방바닥 다시 청소하고, 바느질 거리를 찾고, 꽃잎을 닦는 일로 글쓰기의 공포를 유예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 공포와 고독에 맞서 밤을 밝히는 이들을 모두 조롱하지는 말자. 조롱 속 새는 아프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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