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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맥베스, 마담 보바리,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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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2-25 20:52:21 수정 : 2015-12-25 20: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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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파문에 신뢰 추락… 한국문학 처절한 시련
뜨겁게 갈구하는 독자와의 소통이 펜을 잡는 에너지
다시 일어나 걸어라 그게 숙명인 것을…
“별들아 빛을 감추어라! 내 검고 깊은 욕망을 보지 못하게 하라.”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4대 비극 인물 중 하나인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왕을 살해하기 전 방백을 한다. 마녀는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이라고 속삭였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의 아내는 마침 그들의 성에 와서 하룻밤을 자는 왕 덩컨을 살해하도록 부추겼다. 맥베스는 연이은 살인으로 왕이 되지만 끝내 행복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소리친다. “아, 여보, 내 마음은 전갈로 득실거리는구려.”

내년은 셰익스피어가 죽은 지 400년 되는 해다. 시간이 장구히 흘러도 그의 작품은 부패하지 않는다. ‘맥베스’는 지금도 책으로 영화로 연극으로 21세기 독자와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말 그대로 ‘400년째 살아 있는’ 작가다. 2015년 세밑에도 지금 바로 극장에 가면 저스틴 커젤 감독의 ‘맥베스’를 만날 수 있다. 영화로는 끊임없이 새 버전으로 만들어져 왔다. 가까운 과거만 돌아보아도 2006년에는 제프리 라이트 감독판, 1971년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판 ‘맥베스’들이 눈길을 끌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도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생존한 작가들보다 더 현재형으로 각광받는 작가군에 속한다. 1857년 출간한 ‘마담 보바리’는 시골의 무명작가를 일약 문제작가로 부각시켰고 1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설이라는 장르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인용하는 작품이다. 불문학자 김화영은 그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20여년 동안 단어와 투쟁했고 문장 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겪었다”면서 “글쓰기는 그의 십자가였다”고 역자 후기에 썼다. 이 작품은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맥베스와 마찬가지로 영화로도 끊임없이 가공되고 있다.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소비 바르트 감독의 ‘마담 보바리’는 원본을 비교적 충실히 따라가지만, 지난해 국내에 개봉된 엔 폰테인 감독의 ‘마담 보바리’는 현 시대 인물들에게 보바리 인물형들을 대입해 흥미롭게 풀어냈다. 1949년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마담 보바리’도 제니퍼 존스가 보바리 역을 맡아 눈길을 끌었던 작품이다.

‘문학 노트’에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문학이라는 텍스트의 힘에 새삼 주목하고 싶어서다. 2015년도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 해를 돌아보면 올해 한국문학은 유난히 힘들고 암담한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 지난 초여름 터진 신경숙 표절 파문은 가뜩이나 주목할 만한 작품이 드물어 허덕거리던 한국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푸라기 하나만 더 얹어놓으면 그렇지 않아도 쓰러질 것 같은 한국문학이라는 낙타의 등에 아예 집채만 한 돌덩이를 올려놓은 셈이다. 의기소침해져 창작 의욕을 잃어버린 작가들도 많다고 한다. 쓰러진 낙타를 일으켜 세울 방법은 따로 없다. 누군가 짐을 덜어주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으나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지가 없는 한 그 낙타 녀석은 힘들다는 명분으로 그대로 누워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녀석에게 힘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걸어가는 길의 목표와 지나온 족적일 터이다. 200년이 지나도, 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지금 이곳의 독자들과 뜨겁게 소통하는 문학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다시 일어설 에너지일 것이다. 달라진 환경에 따라 독자들이 책을 덜 읽는다지만 여전히 읽힐 책은 읽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며, 한국문학에 대한 신뢰는 플로베르처럼 20여년 공을 들인 작품 하나면 순식간에 회복될 것이라고 장담한다면 지나친 호언일까. 선배들이 다 써버린 것들이어서 이제 쓸 게 없다는 하소연도 능력 없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플로베르와 동시대를 산 작가들도 그런 한탄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 이곳을 찬찬히 둘러보고 시대와 인간을 성찰하는 탁월한 안목과 깊은 공력으로 문학에 복무한다면 새로운 플로베르는 다시 태어날 터이다. 지켜보자, 내년에는 어떤 작품이 한국문학의 기를 새로 불어넣을지. 조급할 필요도 없지만 낙담할 것도 없다. 다시 일어나 걸어가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어차피 걷는 것 자체가 숙명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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