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170억 대작도 이 영화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영화 ‘히말라야’(감독 이석훈, 제작 JK필름, 제공/배급 CJ엔터테인먼트)의 얘기다.
안타까운 사고로 생을 마감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까지 위험한 여정에 나선 엄홍길 대장과 휴먼원정대의 이야기를 그렸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지난 연말 국내외 대작들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석훈 감독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했다. 기술적으로 영화를 잘 만들어내는 일 외에 실존하는, 혹은 실존했던 인물들의 ‘진심’을 오롯이 전달해야 하는 사명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을 터였다. 이 감독은 시작부터 수월한 작업은 아니었다고 했다.
“산악영화는 처음 찍어본 데다 수많은 기후적·환경적 악조건과 싸워야 했죠. 몽블랑이나 네팔에서의 촬영 말고는 안락한 세트가 없었어요.(웃음) 그러면서도 이 영화를 넘어야 할 산처럼 느낀 것 같아요. 제게 기회가 왔고, 한 번 찍어보고 싶었죠. 산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더 냉정한 시선을 가질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감독이 ‘히말라야’에서 가장 애정을 느끼는 장면은 다름 아닌, 영화 초반 등장하는 ‘시점쇼트’였다고 한다. 해발 8000m가 넘는 에베레스트 산 데스존 인근, 가쁜 숨을 내쉬며 하얀 설원을 걷는 엄홍길 대장(황정민)의 흔들리는 쇼트. 산에 올라보지 않은 관객들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는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산악인들의 삶을 일부러 관객들에게 주입시키듯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관객 누구나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상에 배어들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했던 건 실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70일간의 대장정에도 결국 시신수습에 실패했다는 점이었어요. 이는 다큐멘터리로 소개됐을 정도로 누구나 아는 얘기잖아요. 허구로 포장하지 않고도 단순히 실패한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중요했어요. 그 때 ‘히든카드’로 생각한 게 배우 정유미씨였죠.”
이번 영화에 특별출연한 정유미는 고인이 된 박무택 대장(정우 분)의 아내로 분해 원정대를 위해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빠가 산을 떠나고 싶지 않은가봐요”라는 대사는 관객들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정유미씨가 딱 떠올랐어요. 사실 크지 않은 역할이라 ‘연락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에 제안했는데 유미씨가 긴 고민 끝에 응해줬죠. 분량은 적었지만 분명 부담스러운 역할이었을 거예요. 게다가 첫 촬영부터 감정소모가 큰 장례식 장면이라 많이 미안했어요.”
이 감독이 미안해 해야 했던 사람은 정유미뿐만이 아니었다. 엄홍길 대장은 물론 고 박무택 대장의 유족들의 동의와 배려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작업이었다.
배우 황정민이 연기한 엄홍길, 정우가 연기한 박무택은 작품에 실명을 그대로 등장한다. 이 감독은 “굳이 가명을 쓰는 게 오히려 작품 몰입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아름다운 이야기고 돌아가신 분들을 재조명하는 계기도 될 거라 믿었다”고 실명을 사용한 이유를 밝혔다. 물론 다른 생각을 가진 유족들의 맘도 충분히 고려해 가명을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제작비 100억원대의 대규모 프로젝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좋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이보다 더 힘들 수는 없는’ 촬영이었다. 이 감독은 황정민, 정우, 김인권 등 배우들에게 거듭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못했을 겁니다. 황정민씨는 감독이 원하는 것을 모두 해내는 배우예요. 실제 크레바스 근처에서 촬영한 장면도 있어요. 관객들에게 실감나는 장면을 전달하기 위한 판단이었는데 매우 위험했죠. 할리우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요. 그렇다고 우리 배우들이 귀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닌데, 서로 배려하고 독려하면서 좋은 장면을 찍어내려는 끈끈함이 있었으니까….”
개봉 당시 대중성·오락성 면에서 스토리가 부실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 감독은 “실화에 허구를 가미하는 일에 한계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또한 제작 전 엄 대장 및 유가족들과 맺은 약속을 지켜야 했다. 실화를 어느 선까지 표현할지에 대한 일종의 합의가 있었던 터였다.
이 감독은 ‘흥행’에 대한 부담감도 감추지 못했다. 제작비 100억원이 투입된 대작이다 보니 결과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이런 사정을 관객들이 알 리 없으니 작품성으로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극장가 비수기냐, 성수기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1000만 관객을 바라는 건 무리한 욕심이겠죠. 산이 잠시 허락해서 정상에 머문다는 말도 있잖아요. 1000만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목표치가 아니에요. 다만 영화에 투자하신 분들, 고생해주신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위해서라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결과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현재 상영 중인 ‘히말라야’는 개봉 26일째인 10일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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