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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지금이 저물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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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1-08 21:47:02 수정 : 2016-01-08 21: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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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요금 줄줄이 뛰고
주거비에 등골 휘는데
저물가라는 정부
지도에 없는 길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가
한밤중 길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뉴욕 맨해튼 건너편 뉴저지의 숙소를 찾는 여정은 험난했다. 빠졌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복잡한 간선도로 위를 맴돌았다. 지도에 선명한 그 길은 초행길의 이방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각박한 현실은 ‘인간의 선의’조차 베풀지 않았다. 갓길의 뉴욕경찰은 다짜고짜 권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고 백 투 유어 카!”(차로 돌아갓!)” 도움을 청하려던 이방인은 겁에 질려 차로 뛰어들었다. 10년 전 내게 뉴욕의 밤은 가혹했다. ‘지도에 있는 길’ 위에서 두려움에 싸인 채 두 시간을 헤맸다.

암담했던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낸 건 ‘지도에 없는 길’ 때문이다. 취임 당시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말 “지도에 없는 길을 쉼 없이 달려왔다”고 자평했다. 그러니 내우외환의 한국경제도 ‘지도에 없는 길’을 꽤 멀리 달려왔을 테고 지금도 그 길 위에 있다. 낯설고 험한 환경에서는 지도에 선명한 길도 잃기 십상인 터에 ‘지도에 없는 길’을 가는 건 오죽할 것인가. 의구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경제 현실을 보면 “우리 경제의 활력회복과 구조개혁을 위해서”라는 최 부총리의 설명을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지도에 없는 그 길은 과연 ‘안전한 숙소’로 연결되는 길이기나 한 걸까.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의구심을 키우는 대목은 여럿이다. 당장 물가에 대한 인식이 그렇다. 정부는 새해 경제정책 목표를 저물가 탈피에 맞췄다. 경상성장률을 처음으로 주요 경제지표로 내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경상성장률은 실질성장률에 물가상승률을 더한 것이다. 저물가 탈피, 즉 물가상승폭을 키우는 것이 장기침체에 빠진 경제를 건져낼 급선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이 ‘저물가’인가. 공공요금을 중심으로 물가는 연말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통행료, 교통비, 주민세, 쓰레기 봉투값, 상하수도 요금 등 줄줄이다. 인상계획을 보면 상승률도 두자릿수가 허다하다. 안 그래도 정부의 부동산 중심 내수부양으로 주거비 부담은 갈수록 무거워지는 중이다. 그런데 “저물가를 탈피하겠다”니, 가뜩이나 빚에 짓눌리고 치솟는 주거비에 허덕이는 서민들은 가슴을 칠 일이다.

지난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은 0.7%로 낮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석유류와 농산물을 제외한 근원물가는 상승률이 2%대로 낮지 않다. 또 0.7%가 얼마나 현실 물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집값 상승이 무주택 서민 가계를 짓누르지만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집값 상승분은 반영되지 않는다. 전·월세가 반영될 뿐인데, 이 품목에서도 월세 전환이 늘면서 가계 주거비 부담은 커지는데 물가상승폭은 오히려 줄어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통계청 관계자는 “전세가 월세로 바뀌면서 상승폭을 줄이는 효과는 나타난다”고 인정했다. 지난해 전세는 3.6%, 월세는 0.3% 올랐는데 월세 거래량은 전년보다 30% 이상 늘었다.

물가에 대한 의심은 통화정책의 심장부, 한국은행에서도 나온다. 한 고위관계자는 “공공요금이 뛰고 주거비가 무섭게 치솟는 상황을 두고 저물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부 경제정책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정책이 된다. 공직을 맡고 있는 한 경제학자는 “정부에 대세를 보면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는지 모른다. 세밑 인터뷰에서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하나도 먹히지 않는 옛날식 정책만 쓰고 있다”고,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산업화시대부터 쓰던 고장난 엔진을 돌리고 있다”고 평했다. ‘위기의 본질’을 모른 채 엉뚱한 처방을 쓰고 있다는 게 두 경제대가의 공통된 지적이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지도에 없는 길가에 ‘권총 위협’에 몸을 숨길 대피처는 있는 것일까.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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