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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언증 갤러리' 열풍… N포세대 위로하는 망상놀이

입력 : 2016-02-10 19:30:30 수정 : 2016-02-16 15: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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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임시 개설 한주 만에 정식 코너로 “지인이 세계 5대 수학난제를 보여줬습니다. 스치듯 문제를 보고 답을 말해버렸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걸 푸는 순간 세상 모든 2진법, 6진법, 16진법의 순서가 파괴되고 4차원, 5차원 공간의 비밀도 풀리게 됩니다. 저는 혼란이 싫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ㅠㅠ 제발 도와주세요.”

세계 5대 난제를 순식간에 풀고, 그것도 모자라 공간의 비밀이 풀릴까봐 걱정하는 고민이라니? 이게 웬 황당한 소리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허언증 갤러리’에 올라온 글 중 하나이다.

허언증 갤러리는 지난달 13일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 ‘디시인사이드’에 임시로 문을 연 지 일주일 만에 ‘핫’한 반응을 이끌며 정식 갤러리로 승격했다. 이용자들은 매일 700여건의 글을 공유하며 ‘허언증’ 대결을 펼친다. 심지어 ‘본인 인증’한다는 글에는 실제 자신의 사진이 아닌 원빈, 장동건, 데이비드 베컴 등 유명인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물론 누가 봐도 거짓말이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못생겼네” 등의 댓글을 달며 기꺼이 속아준다.

디시인사이드 ‘허언증 갤러리’는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통해 남들을 속이는 ‘망상 대결’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아이돌 그룹 멤버 ‘설현’과 ‘혜리’도 데이트하자고 조르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어릴 적 해수욕장에 놀러가 만든 모래성일 뿐이다. “님들 저 자산 2000억원임” “인기가 너무 많아 피곤하다”라는 제목부터 “우리 집 마당에서 공룡화석 발굴됨 ㅋㅋ”이라는 내용까지 거짓말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이들이 올린 글 중 피드백이 좋은 글들은 따로 ‘허언증 갤러리 베스트’, ‘허언증 레전드’ 등의 제목으로 재작성돼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로 퍼질 정도다.

인터넷에서 허위·과장글을 작성하는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과거에도 남을 속인다는 ‘짜릿함’과 과시하고 싶은 ‘자랑욕구’를 엿볼 수 있는 글은 꾸준히 있었다. 일부는 아예 ‘낚시주의’라는 머릿글을 달고 대놓고 ‘나 거짓말 할 테니 속을 테면 속아봐’라며 사람들을 끄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허언증 갤러리’처럼 아예 거짓말의 장을 열어놓는 장소가 생긴 사례는 이전에는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다. 

디시인사이드 ‘허언증 갤러리’는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통해 남들을 속이는 ‘망상 대결’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는 “이용자에게 웃음을 주는 놀이는 인터넷 초창기부터 있었는데 ‘허언증’이라는 키워드로 카테고리화한 것은 ‘허언증 갤러리가’ 처음”이라며 “속았다는 느낌이 들어 허탈하지만 곧 이어 ‘내가 더 속이고 싶다’는 욕구가 들게 하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외모부터 학력, 직업까지도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는 이곳에서는 오직 ‘누가 더 황당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느냐’로만 평가된다. 하지만 글의 소재가 ‘취업’, ‘연애’ 등 팍팍한 현실을 겨냥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오늘 편의점 알바 면접에서 탈락했습니다’라는 글이 대표적이다.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새벽타임 편의점 알바를 목표로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현재 현대자동차 경영지원팀에서 경력을 쌓고 있습니다. 토익 만점은 기본이고 CPA 자격증을 비롯한 각종 세무 관련 자격증을 보유 중인데 오늘 편의점 알바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네요. 2차 면접까지 붙었을 때 부모님께서 많이 기대하셨는데 최종에서 떨어지니 더 많이 아쉽습니다.”

이 글은 젊은 세대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소재로 ‘취업난’에 시달리는 20∼30대의 고통을 유머로 승화했다.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됐는데, (노벨상이) 9급 공무원 시험에 가산점이 있나 궁금하다”는 글에서는 허언증이 단순히 ‘실속이 없는 빈말’을 넘어 현실에 대한 ‘풍자’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과 거짓인 듯한 ‘진실’이 혼재해 있는 이곳에서 주 사용층인 20∼30대들은 사회적으로 뚜렷하게 내세울 것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주변 소재를 이용해 ‘망상 대결’을 펼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노력하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는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헛된 꿈을 꾸는 데 시간을 소모하지 않는다”며 “지금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노력’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다”고 지적했다. 이어 “SNS에서의 ‘자랑질’ 문화가 확산한 반면 현실에서 자신이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이런 ‘망상놀이’를 통해서라도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구가 발현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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