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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밥에 새우젓 반찬 뿐…온종일 노역·구타 시달려"

입력 : 2016-02-15 16:29:06 수정 : 2016-02-15 16: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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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선감학원 생존자들 경기도의회 간담회서 증언
경기도의회 조례안 통과…"피해·생존자 지원 박차"
50여년 전, 영문도 모르고 경기도 안산시의 작은 섬 선감도로 끌려온 10살 남짓의 소년들은 밤낮없이 고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모심기, 누에치기, 염전 노역까지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일들을 강요당하고,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먹는거라고는 밀밥에 새우젓이 전부인 탓에 굶주림을 못견디고 도망치다 목숨을 잃은 경우도 다반사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지난 1982년까지 경기도 안산 선감학원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선감학원은 지난 1942년 4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한 일제의 인적·물적 자원 수탈 과정에서 조선 소년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외부와의 접촉이 불가능한 섬 지역에 위치해 있어 끔찍한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해방 이후 이 시설은 1946년 2월 경기도로 이관됐지만, 이후 36년간 부랑아 수용시설로 운영되면서 원생들에 대한 폭행은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강제노역이 자행됐다.

이들은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9시에 잠들 때까지 굶주림에 시달리며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배명기(67)씨는 "인천 송현동에 살고 있었는데 행색이 남루한 나를 경찰관이 파출소로 데려갔다가 선감학원으로 보냈다"며 "입소 후에는 잠시도 쉴 틈없이 농사일을 했다. 일이 조금이라도 서투르면 곡괭이 자루로 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밀밥에 새우젓이 식사의 전부다 보니 배가 고파서 쥐와 뱀을 잡아먹었다"고 끔찍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고된 나날이 계속되다 보니 탈출을 감행하는 원생들도 많았다.

김성국(66)씨는 "군대로 치면 막사가 5∼6 군데 있었는데, 각각 힘센 원생이 사장을 맡아 다른 원생들을 구타했다"며 "배고픔, 노역, 폭행이 두려워 7번이나 탈출을 했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물이 빠진 시간을 틈타 바다를 건너가도, 선감학원 소년들은 광목으로 된 옷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알아보고는 붙잡아 신고하기 일쑤였다"며 "선감학원은 주민들에게 밀가루 한포와 신발 한켤레를 주며 신고를 독려했다"고 덧붙였다.

굶주림과 폭행, 노역을 견디다 못해 숨진 나이 어린 소년들은 선감도에 소리없이 묻히기도 했다.

선감학원이 폐쇄된 1982년까지 21년간 수용됐던 김충근(67)씨는 "아사하거나 익사한 동료들을 내손으로 묻은 적도 있다"며 "아마 찾지 못한 희생자들도 섬 곳곳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경기도의회가 15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경기창작센터에서 뒤늦게 연 '경기도 선감학원 아동·청소년 인권유린사건 피해조사 및 위령사업추진 간담회'에 나와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도의회는 앞서 '경기도 선감학원 아동·청소년 인권유린사건 피해조사 및 위령사업에 관한 조례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조례안을 낸 정대운(더불어민주당·광명2) 의원은 "우여곡절 끝에 조례안이 통과됐지만, 용역 예산으로는 2억원이 편성돼 아직 부족하다"며 "우선 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확한 피해 조사 및 유해 발굴 등 지원사업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설명했다.

도 관계자는 "조례안 통과와 위원회 구성은 피해자들의 한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생존자들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반영해 지원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전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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