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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북인의 짧았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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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3-29 20:16:06 수정 : 2016-03-29 21: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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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색당파 중 가장 분열 심해 몰락
이합집산 정치권, 역사의 교훈 되새겨야
최근 총선 공천을 둘러싸고 여야를 막론하고 계파 간 분열이 절정에 다다랐었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정치인에 대해서는 ‘친박’, ‘비박’, ‘진박’, ‘친이’뿐만 아니라 ‘친유승민계’, ‘친김무성계’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친노’, ‘비노’, ‘친문’에 이어 ‘친김종인계’라는 분류도 있으며, 국민의당 역시 계파 간 분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당쟁(黨爭)에서도 계파 내 분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당쟁의 시작은 선조대인 1575년(선조 8)에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이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직을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일어났고, 정파의 영수였던 김효원과 심의겸의 집이 각각 한양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명칭이 생겨났다. 현대 정치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세력을 ‘상도동계’, 김대중 전 대통령 지지세력을 ‘동교동계’라 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조선시대 당파 중 내부 분열이 가장 심했던 정파는 북인(北人)이었다. 북인은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정파인데, 1588년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때에 조정에 이미 남인과 북인의 설이 있어, 서인을 치우치게 배척하는 것을 북인이라 하고 피차를 인정하는 것을 남인이다’고 하여 북인이 서인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한 정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북인은 특히 자체 분열이 많았다. 처음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고, 대북은 다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분열됐다. 대북과 소북의 분립은 선조의 후계자를 둘러싼 대립 때문이었다. 이미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 이이첨, 이산해 등을 대북이라 했고, 1606년에 태어난 적장자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지지한 유영경 등을 소북이라 했다. 대북 내에서는 영의정 이산해 중심의 골북(骨北)과 병조판서 홍여순 중심의 육북(肉北)으로 또다시 갈라졌다. 소북 내에서는 유영경을 지지하는 유당(柳黨)과 남이공을 지지하는 남당(南黨)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에도 사관은 ‘북인은 대북·소북·골복·육북으로 찢기어 갑(甲)이 득세하면 오직 그 한쪽 사람만을 기용한다’고 하면서 북인의 분열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권력은 대북의 차지가 됐으나, 대북의 독주가 지속되자 이에 반대한 정온 등은 이탈해 중북(中北)으로 불렸다. 광해군 시대 대북 정권의 독주는 서인과 남인 등 반대세력을 결집시켰고,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북인 세력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북인은 당파의 역사에서 가장 짧은 기간 존속됐는데, 정치적 이해와 영수의 움직임에 따라 여러 차례 분열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주요 정치인을 중심으로 각 정당이 심각하게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계보 중심의 분열에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사실은 더욱 심각하다. 각 정당은 역사에서 분열을 거듭하다 짧은 운명을 마감한 북인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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