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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살아 있는 ‘브룩슬리 본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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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29 18:01:04 수정 : 2016-04-30 0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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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파생상품 재앙 예견하며
신자유주의 세력에 맞섰던 ‘투사’
정피아·실적 부풀리기에
기업 망가지는 한국의 현실
누군가 ‘NO’라고 외쳐야 한다
그제 2008년 금융위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The Warning’(경고)을 봤다. 장소는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강당이었다. 금감원 노조가 자리를 마련했다. 2009년 미국 방송사 PBS가 만든 이 다큐엔 금융위기의 주역들이 등장한다. 앨런 그린스펀, 로버트 루빈, 래리 서머스. 미 연준 의장으로, 재무장관으로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한 거물들이다. 이들은 모두 신자유주의 첨병, 시장만능주의자들이었다. “시장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며 규제 반대를 외치고, 관철시켰다.

다큐는 이들에게 맞섰던 한 여성 변호사에게 집중한다. 금융전문변호사로 명성을 쌓은 브룩슬리 본. 클린턴 정부에서 ‘따분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관’으로 인식되던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을 맡은 그는 금융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전설적인 전투’를 시작한다. 거대하고 강력한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전투였다. 그린스펀과 본은 첫 만남에서부터 어긋났다. “사기행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본데…”(그린스펀), “예, 그럼요.”(본), “아시다시피, 시장이 사기꾼을 알아서 해결할 겁니다.”(그린스펀)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본은 단호했다. 규제공백의 시장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장외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규제 준비에 나섰다. 시장을 신봉하는 그들은 본의 입을 틀어막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런 와중에 장외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수십억달러 손실을 본 다국적기업 P&G가 이 상품을 판 투자은행 뱅커스트러스트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뱅커스트러스트가 복잡한 파생상품을 악용해 사기를 쳤음이 드러났다. “하하, 이 멍청이들이 진짜 좋은 상품이라고 생각해. 결국 참담한 꼴을 당할 텐데 말이야.” 비밀녹취록에서 뱅커스트러스트 직원들은 파생상품 거래를 몽정(wet dream)으로 묘사하며 낄낄거렸다.

본은 파생상품이 경제를 망가뜨릴 수 있음을 직감하고 ‘개념설명서’ 공표로 규제에 나서기로 했다. 반격은 즉각적이었다. 루빈 장관은 긴급회의를 소집해 “절대 안 돼”라고 윽박질렀다. 본이 굴복하지 않고 개념설명서 발표를 지시하자 이들은 성명을 통해 “매우 심각한 사태로, 의회가 조속히 저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곧 이어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 그린스펀은 “아무 쓸모도 없는 규제가 시장 효율성을 저해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그의 손을 들어줬다. “평범한 미국인의 돈을 지키려 한다”는 본의 외침은 무력했다. 그에게 1998년 여름은 뜨겁고 잔인했다.

두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대형사건이 터졌다. 규제공백 속에 영업하던 롱텀캐피털(LTCM )이 파산했다. 자본금 500만달러를 1조달러 파생상품 거래로 둔갑시키던 이 금융사는 러시아 금융위기로 좌초했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다. 의회에서 마침내 규제강화 요구가 나왔으나 그린스펀의 반대 장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의회는 거꾸로 칼끝을 본에게 돌려 그를 제거했다.

본이 사임한 후 월가는 규제완화의 전성기를 맞았다. 은행들은 더 위험한 투자를 할 수 있었고 월가는 날로 폭발력이 커지는 시한폭탄을 껴안고 파티를 즐겼다. 본이 분투할 때 27조달러 규모이던 장외파생상품은 2007년 595조달러대로 성장했다. 마침내 시한폭탄이 터졌고 수백만명이 집과 일자리를 잃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그린스펀의 반성은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었다.

본은 졌지만 그의 경고는 살아있다. ‘정피아’ 등 낙하산 행렬과 실적 부풀리기와 같은 위선과 부조리가 여전한 한국 현실에서 특히 그 의미는 현재진행형이다. 힘 있는 자들이 말로는 개혁을 외치면서 몸은 구태를 반복하며 기업을 망치는 동안 ‘본의 경고’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금감원 노조 관계자는 “위기 발생 전에 경고를 하는 것이 감독당국의 의무인데 지금 이런 근본적 업무가 뒷전으로 밀리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금감원은 수십만 보험가입자의 손실을 야기할 ‘수상한 변액보험 거래’를 조사하고 “제재가 불가피하다”더니 이조차도 1년 반이 다 되도록 감감소식이다. 본처럼 용기있게 나선 해당 보험사 감사임원만 2년이 넘도록 ‘왕따’ 신세다. 한국에서도, 본은 지고 있다.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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