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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 칼럼] 모래를 걸러 금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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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5-19 21:50:47 수정 : 2016-05-19 21: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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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선봉에 선 일본 장수
농부 효심에 감복해 투항
한·일 갈등 접고 화해하려면
김충선 ‘평화 DNA’ 본받아야
전쟁이 터졌다. 오월의 봄날, 스물두 살의 청년이 바다를 건넜다. 난생 처음 밟는 조선 땅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진격하다 피난을 떠나는 농부 가족을 보게 되었다. 병사들이 총을 쏘는 와중에도 농부는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아내와 아이들이 종종걸음을 쳤다. 젊은 장수는 자기 목숨보다 노모를 더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농부의 지극한 효심에 칼날처럼 번뜩이던 살기가 눈처럼 녹아내렸다. 청년은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야가(沙也加)이다.

사야가는 그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나라를 어찌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착한 백성들을 죽이는 일은 옳지 않다고 여긴 사야가는 자신의 부하 500여명과 함께 조선에 투항하기로 결심했다. 죽음보다 힘든 결단이었다. 자신의 지위와 조국, 그리고 부모형제까지 버리고 예전의 동료들을 향해 칼을 겨눠야 했기 때문이다. 사야가가 투항한 것은 전쟁 시작 일주일 만이었다. 더구나 왜군이 조선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던 때였다. 승리한 군대가 패한 적군에게 단지 ‘인의(仁義)’를 이유로 항복한 사례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배연국 수석 논설위원
그는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조선에 투항해 일본과 맞서 싸우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저는 섬 오랑캐의 천한 사람이요, 바닷가의 보잘것없는 사나이입니다. 사람이 사나이로서 태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나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 나라에 나서 끝내 오랑캐로 죽게 된다면 어찌 영웅의 한(恨)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침식을 잊고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귀화한 사야가는 부하들이 소지한 조총으로 조총부대를 편성해 왜군을 무찔렀다. 조총 사용법뿐만 아니라 조총과 화약의 제조기술을 조선에 전수했다. 조선군이 육지에서 전세를 회복해 왜군과 대등한 전투를 치른 것은 사야가의 힘이 컸다. 1598년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사야가에게 벼슬을 내리고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은 ‘충성스럽고 착하다’고 해서 ‘충선(忠善)’이라고 했다. 성은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는 의미를 담아 김씨 성을 주었다. 옛 일본 이름 사야가의 사(沙)에서 조선의 김(金)이 탄생한 것이다. 그가 바로 항왜 장수 김충선이다.

어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4년이 되는 날이다. 김충선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한국과 이웃 일본의 현실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오늘의 일본은 젊은 왜장을 고뇌 속으로 몰아넣었던 오랑캐 근성을 버렸는가. 군대위안부 만행과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을 잊은 그들이다. 과거의 기록을 분칠하고 히로시마를 원폭 피해지역으로 바꾸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외양은 양 가죽을 쓴다지만 내면의 오랑캐 근성은 어찌할 건가.

일본만 탓할 일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문화의 땅’이라고 도저히 자부할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만약 김충선이 부활한다면 그런 나라에 과연 귀화하고 싶겠는가. 선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은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반성 없는 일본을 참회의 길로 이끄는 방책이기도 하다. 착한 문화의 나라라면 세계의 친구들이 도와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근세기에 한국과 일본은 전쟁의 아픔을 겪었다. 그 상흔을 딛고 자유의 꽃을 피우고 나란히 세계 경제강국으로 부상했다. 모래를 걸러 금을 만든 격이다. 그런 기적을 일군 양국이 과거의 앙금을 씻지 못한 채 아직도 으르렁거린다. 5000만 한국인이 비난하면 1억2000만 일본인이 우리를 삿대질한다. 증오와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악의를 후대에까지 물려주는 것은 양국의 미래에 더없는 비극이다.

두 나라가 진정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양국 국민의 마음속에 있는 김충선의 ‘선한 DNA’를 끄집어내는 일이다. 증오와 갈등의 모래를 걸러 ‘화해의 금’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김충선의 후예가 아닌가.

배연국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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