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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칼럼] 말의 어지러움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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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5-24 21:56:36 수정 : 2016-05-24 21: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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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협치’ 정치권 유행어
‘한국형 양적완화’도 논란 빚어
말하는 데 무능력함 드러낸 것
심각하게 여겨야 할 이상 징후
은폐 의도거나 상상력 빈곤 탓
말의 타락은 사회적 불신 초래
말은 현실을 알게 해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하는 데 그 유용성이 있다고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유대인 학살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돼 있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말은 이처럼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에서 말이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반영한 듯하다. 여소야대의 20대 국회를 앞두고 ‘협치’라는 말이 만병통치약처럼 쓰인다. 원래 협치는 거버넌스(governance)를 번역한 말로,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결정 과정에 시민단체 등이 함께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협치는 대화와 타협에 의한 협력정치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야가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생소한 말을 끌어들인 이유를 알 수 없다. 곧잘 쓰이는 ‘연정’이란 말도 정체가 불분명하다. 연정은 연립정부를 줄인 말로, 둘 이상의 정당이 제휴해 의회 다수파가 돼 정권을 맡는 것이므로 의원내각제에서 가능한 일이다. 야당에 정부 고위직 몇 자리 주는 것을 연정이라 부르기 어렵고, 이마저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연정이란 말은 끊임없이 나온다.

박완규 논설위원
정부도 마찬가지다.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에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이름을 달았다. 정부가 재정에 손대기 어려우니 한국은행이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떠맡으라는 뜻이 담겼다. 양적완화라고 하면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야 할 일이 된다. 경제위기 상황에 써야 할 정책수단을 섣불리 언급하는 바람에 쓸데없는 논란이 빚어져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 정부가 말하는 구조조정도 모호하긴 매한가지다. 대상이나 규모, 진행 방식부터 컨트롤타워에 이르기까지 온통 오리무중이다.

심각하게 여겨야 할 이상 징후다. 정치권이나 정부에서 쓰이는 부박한 말은 공문서나 언론을 통해 국민 모두의 것으로 각인될 수 있다. 소설가 최일남이 칼럼집 ‘말의 뜻 사람의 뜻’에서 정치언어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이라는 것은 누가 만들어냈건, 일단 한 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속에 ‘익사’하기 쉬운 주술적 효과도 지니는 법이어서,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말은 정확해야 한다. 정치권이나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명확한 뜻을 담아야 단계별 처리 과정에서 오류를 피할 수 있다. 뜻이 분명치 않으면 모두 책임을 피하는 방법만 찾다가 일을 망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에 번지는 말의 어지러움에는 사실을 왜곡시켜 책임을 은폐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내포된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모호한 말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소설가 김훈은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서 “욕망과 이득에 바탕한 말들은 사실을 지운다. 그 말들은 거대한 명분을 뒤집어쓰고 뻔뻔스러워진다. 말은 무기로 변한다”고 했다. 말이 잘못 쓰이는 데 대해 경계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철학자 남경희는 ‘이성과 정치존재론’에서 “한 사회 내에서 말의 논리의 부재는 말의 타락을 가져온다. 그리고 말의 타락은 그 사회에 불신을 심어준다”면서 “정치는 어휘의 의미를 끊임없이 왜곡시켜 의미의 이중 가격을 형성시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으로 이뤄지는 것인 만큼 올바른 말을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약속된 말을 쓰는 것은 합리적인 대화의 전제조건이다. 정치권 포퓰리즘 등으로 말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면 사회가 분열되고 나아가 붕괴된다는 것은 고대 이래 인류사에 숱한 사례를 남긴 철칙이다.

요즘 말 쓰임새를 보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왜 뒷걸음 치는지 알 듯하다.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적합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쓴다. 어떤 의도가 있거나 아니면 상상력이 빈곤한 탓이다. 둘 다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직도 친박·비박, 친노·비노 같은 볼썽사나운 구시대적 프레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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