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백영철칼럼] 박정희의 재떨이는 버려야 한다

관련이슈 백영철 칼럼

입력 : 2016-05-31 22:00:05 수정 : 2016-05-31 22:00:0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아버지 방식은 1960년대나 통할 뿐
남은 임기, 리더십을 시대에 맞춰야
박근혜 대통령이 아프리카에서 ‘상시청문회’ 법안의 거부권을 행사한 지난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와 여당을 어떻게 다뤘는지 궁금해졌다. 다시 꺼내 읽은 책은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 ‘정치는 가슴으로’다. 아버지는 여당 지도부를 고양이가 쥐 몰 듯 했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1968년 2월 29일 밤 10시 반. 청와대 집무실에서 김종필 당의장이 말을 꺼냈다. “각하, 야당이 농성을 하고 있어 정상적 통과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다음 회기에 통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 순간 박 대통령이 재떨이를 김 의장 머리 위로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 나라 경제 발전을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데, 뭐 야당이 반대한다고 국회에서 통과를 못 시켜?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여당은 뭐 하는 것들이야. ” 

백영철 편집인
당시 7대 국회는 절대적 여대야소였다. 공화당이 전체 의석의 73%를 차지한 반면 야당 신민당은 25%에 불과했다.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건설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석유류세법 개정안을 목적세로 바꾸는 세법 개정안을 제출했는데 야당이 단상을 점령한 채 저지한다고 여당 지도부가 머뭇대자 격노한 것이다. 재떨이에 혼비백산한 국회의장과 여당 지도부는 그날 밤 즉시 국회로 돌아가 야당 의원들을 들어냈다. 회기 종료 40분 전에 법안은 날치기 처리됐다.

‘성격은 운명’이라고 했다. 아버지 박 대통령의 운명적 캐릭터는 뭘까. 재떨이를 던지면서 그가 외친 “내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데, 누가 반대를 해?”라는 말에 압축돼 있다. ‘나라를 위한 것이니 방법이 독단적이면 좀 어떠냐’는 생각을 그에게서 읽을 수 있다. 좋게 말하면 애국심이나 나쁘게 말하면 권력의 사유화다. 이만섭 회고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여당 사람이 못마땅하면 청와대로 불러 재떨이뿐 아니라 컵도 벽으로 던지고 책상도 걷어찼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3선개헌을 공개 반대한 이만섭 의원은 외면당했다.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청와대에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고, 행사장에서 마주쳐도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고 회고록은 기억한다.

아버지와 딸은 닮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40여 년의 시차가 있는데도 여당과 국회에 대한 대통령의 행동이 이렇게 비슷하게 드러날 수가 없다. 최근 것만 봐도 박근혜 대통령은 협치 분위기 조성이 절박한 상황에서 거부권을 행사했고, 대통령을 따르는 친박계는 정진석 원내대표가 민심 수용을 위해 비박계 주도의 비대위를 꾸리자 힘으로 판을 엎어버렸다. 유승민 의원은 박 대통령과 친박계로부터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 같은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당은 일사불란해야 하며 대통령의 판단은 나라를 위한 것이니 야당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1960년대 사고방식 아닌가.

강공 일변도의 반작용은 고스란히 박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제20대 국회가 시작됐지만 청와대와 야당은 덕담도 주고받지 못하는 사이가 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 망한다”는 말까지 했다. 정 원내대표의 결의도 예사롭지 않다. 그는 그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청와대의 일방통행에 호응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친박계의 흔들기에 지독한 정치적 수모를 당한 만큼 빈말은 아닐 것이다.

여소야대 국면에다 야당은 벼르고 있고 여당 원내대표마저 ‘정상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시국이 보통 엄중하지 않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의 생각은 여전히 아버지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야당을 맘대로 주무르는 시대가 아닌데도 말이다. 걱정은 청와대 비서실에서 비롯된다. 대통령을 말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의 말 많은 비서들을 다 유임시키고 힘센 비서들에게 ‘말빨이 별로인’ 이병기 비서실장만 퇴출시켰다. 이와 관련한 세간의 풍설은 온전한 정신으로 귀담아듣기 어렵다. “이 실장이 어떤 건의를 했는데 문고리 권력인 정호성을 통하라고 해 모멸감을 느껴 사표를 던졌다”, “충성심 강한 우병우 민정수석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렸다”는 등 여러 설이 나돈다. 다 정상이 아니다.

아버지 박 대통령은 비운에 갔지만 많은 것을 이뤘다. 국민의 가슴속엔 영원한 일등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를 따라 해야 할 덕목은 수두룩하다. 통찰력이나 비전, 추진력, 지속적인 의지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만 일하는 방식만은 따라 해선 안 된다. 시대와 여건에 따라 방식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재떨이를 던지는 것은 그 시대에서나 가능하다. 오늘 한국은 여소야대인 데다 민심은 여당을 2당으로 만들었다. 대치와 대립, 일방통행 대신 협치와 공감, 쌍방 소통이 절실하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뛰어넘으려면 ‘박정희의 재떨이’를 버려야 한다. 리더십을 시대에 맞추지 않고서는 남은 임기 동안 식물대통령을 벗어날 수 없다.

정치와 경제는 쌍두마차다. 정치가 무너지면 경제도 무너진다. 외교가 비록 화려하고 다른 나라의 대통령도 외교적 활동으로 레임덕을 모면했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정치와 경제의 실패를 만회하지는 못한다. 임기가 아직 1년9개월이나 남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업적을 남기기에 부족한 시간이 아니다.

백영철 편집인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