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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칼럼] 낙하산의 “네 탓”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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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13 20:45:33 수정 : 2016-06-13 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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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 1997년 악몽 되살리는“들러리만 섰다”는 발언
기업 생살여탈권 가진 산은 회장 3년 동안 허수아비 노릇만 했나
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은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런 말을 했다. “산업은행은 들러리만 섰다.” “지난해 10월 중순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이 결정한 내용을 전달받았다.”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4조2000억원 지원을 두고 한 말이다. 북 치고 장구 친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압박감 때문일까. 검찰 수사가 시작됐으니 책임을 뒤집어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관료와 금융기관 사이에는 시키는 대로 하라는 군대식 서열문화가 남아 있다.” 맞다. 열이면 열 그런 말을 한다.

강호원 논설위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홍 회장은 허수아비였나. 산업은행은 갑 중의 갑이다. 과거와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기업의 생살여탈권을 거머쥐고 있다. 그래서 산업은행 회장은 얼마 전만 해도 총재로 불렸다. 산업은행 회장이 허수아비라면 누구인들 허수아비가 아닐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산업은행이 얼마, 수출입은행이 얼마 지원하는 것까지 딱 정해져 왔다.” 두 국책은행의 지원 비율 결정 때 말발이 먹혀들지 않은 것을 두고 “들러리”라고 한다면 큰 착각이다. 왜? 그것은 산업은행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라경제 전체를 놓고 따져야 할 일이다. 홍 회장도 말하지 않았는가. “산업은행은 채권 비율에 따라 지원하자고 했지만 그렇게 되면 수출입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8% 이하로 떨어져 해외보증 무효로 기업들이 망한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묻고 싶은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청와대와 금융당국 몫으로 3분의 1씩 가져가고 산업은행이 행사한 인사권은 3분의 1 정도였다”고 했다. 자회사 인사를 두고 한 말이다. 산업은행이 ‘낙하산 전권’을 갖지 못한 것이 잘못됐다는 말인가. 낙하산 인사가 잘못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왜 일언반구도 없는가. 잘못된 낙하산이 화를 부른 씨앗이라는 말은 왜 하지 않는가. 그도 낙하산이었다. 취임 때 “낙하산이기 때문에 부채가 없다”고 했다. 그가 회장을 맡은 기간에 대우조선은 더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스스로 무엇을 했는지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전후좌우 어디를 봐도 홍 회장의 말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네 탓’ 타령. 숱하게 들은 소리다.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 그때도 “내 탓”이라고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바닥난 외환을 빤히 보고도 은행감독원 분리에 반대해 머리띠를 두르고 시위를 벌인 한국은행 임직원들, 얼토당토않은 ‘국민기업’ 간판을 내걸고 나라 신용을 좀먹은 기아자동차의 썩은 경영진, 위기의 순간 정쟁만 벌인 정치인들, 부실 관료들…. 말로라도 사과 한마디 했던가. 너나없이 “네 탓”만 외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라는 파산했다.

홍 회장의 말에서 치 떨리는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그때는 왜 말하지 않았는가. 산업은행 회장이 일을 똑바로 하고자 한다면 장관 할아버지인들 삐뚠 일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육정육사(六正六邪). 바른 신하와 사악한 신하의 등급을 나누는 말이다. ‘설원(說苑)’에 나온다. 여섯 가지 사악한 신하 첫머리에는 구신(具臣)이 오른다. ‘구’ 자는 시신을 셀 때 붙이는 단위다. “구신은 벼슬자리와 봉록만 탐하며, 공사(公事)에 힘쓰지 않고 시세에 따라 부침하고 늘 좌우만 돌아본다.” 시비(是非)를 따지지 않고 사익만 챙기니 일이 제대로 돌아갈 턱이 없다. 잇속을 챙기기 위해 참언을 일삼으면 참신(讒臣)으로 변하고,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뒤 온갖 험한 말로 비방을 일삼아 나라를 망치면 망국신(亡國臣)으로 변한다. 그러기에 구신은 독(毒)의 씨앗이자 독 중의 독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그 해악은 더 심하다.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악한 구신’의 행태를 당연시하고, 그 구신이 참신과 망국신으로 변하기 때문은 아닐까. 무너지는 나라경제. 어찌 일으켜 세울지 다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네 탓’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권 말, 본색을 드러내는 구신은 또 얼마나 많을까. 고려 때 김심언이 12도(道) 주현 관아에 붙인 육정육사의 글을 방방곡곡에 내걸기라도 해야 하나. 한심한 노릇이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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