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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임란의 피난일기 쇄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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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21 21:52:23 수정 : 2016-06-21 21: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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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이 9년여의 참상 역사로 남겨
호국의 달 국방의 의미 다시 새겨야
3일 후면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6돌이 된다. 6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6·25 전쟁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당시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참상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한다. 해마다 6월 이 무렵이면 6·25 전쟁과 관련된 각종 기록을 접하게 된다.

또 조선시대 최대의 전쟁인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도 다수 남아 있는데,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류성룡의 ‘징비록’, 의병장의 참전 기록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피난민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록한 책도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鎖尾錄)’이 그것으로, 6·25 전쟁 시기 피난 생활을 기록으로 남긴 것과도 유사하다. 1591년 11월부터 시작해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을 ‘쇄미록’이라 한 것은 ‘시경’의 ‘쇄혜미혜(瑣兮尾兮·누구보다도 초라함이여) 유리지자(遊離之子·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에서 ‘쇄’와 ‘미’를 따온 것으로, 유리기(遊離記) 또는 피난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오희문은 장수현감으로 있던 처남 이빈(李贇)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홍주, 임천, 아산, 평강 등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피난을 했다. 일기의 기록을 따라가 보면, “전하는 말을 들으니 왜선(倭船) 수백 척이 부산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더니 저녁에 들으니 부산과 동래가 모두 함락됐다고 하니 놀라움을 이길 수가 없다. 생각건대, 성주가 굳게 지키지 못한 까닭이다.”(1592년 4월 16일), “적이 서울로 들어가서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고 도성을 지키지 못했으니 슬프다. 우리 생령(生靈)들이 모두 흉한 칼날 앞에 피를 흘리고 늙은 어머니와 처자가 유리하여 떠돌아 죽고 산 것을 알지 못하니 밤낮으로 통곡할 뿐이다.”(4월 19일) 등 전쟁의 참상을 증언한 내용이 다수를 이룬다.

개인의 피난 생활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1592년 7월 초부터 오희문은 한 달 이상 거의 매일 산속 바위 밑에서 지냈다. “산속 바위 밑에 있었다. 아침에 사람을 보내서 현에 가서 적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고 또 두 종을 보내서 감추어둔 바위구멍에서 옷을 가져다가 추위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5일), “골짜기 산속 시냇가에서 잤다. 이날은 곧 칠석 가절(佳節)이다. 갓모를 쓰고 밤을 새웠다. 이 밤의 괴로움은 입으로 형용해 말할 수가 없다”(7일)는 등의 기록에서는 비참한 피난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7월 15일의 일기에는 울고 있는 모자의 사연을 전하고 있다. “세 사람이 떠돌면서 걸식했는데 이제는 더 빌어먹을 곳이 없어서 장차 굶어 죽게 됐으므로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으니 우리 모자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594년 4월 2일의 일기에 기록된 사람끼리 잡아먹는 상황에 관한 내용이나, 피난 후 돌아온 집에 “시체가 쌓여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 기록에서는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큰 파멸로 이끌어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국방강화와 전쟁의 억제가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다시금 환기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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