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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문학기행] 우정의 편지, 행간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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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07 21:53:03 수정 : 2016-07-07 21: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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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이야기 나눌 매체 점점 사라져
연암과 박제가 정감 어린 소통 감동적
문자메시지를 하루에도 수십 통씩 주고받는 현대인이지만 다정한 손편지를 주고받는 관계는 얼마나 될까. 우리는 옛사람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유통시키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따뜻하게 토로할 진심 어린 소통의 매체를 잃어간다. 문득 정감 어린 손편지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시간, 나는 옛사람의 편지를 찾아 읽으며 허전함을 달래곤 한다.

최근에는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 사이에 오갔던 편지가 마음을 울렸다. ‘붓으로 오악(五嶽)을 누르리라’는 꿈의 계시를 받은 불세출의 문인 연암,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너도나도 필사해 돌려 읽기 바빴던 천하의 문필가 연암이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가난이었다.

정여울 작가
그래서인지 연암의 편지에는 돈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많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연암은 유머를 잃지 않는다. 박제가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 지 오래 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일세.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네. 여기 호리병을 보내니, (술을) 가득 채워줌이 어떨까?” 누구에게도 무릎을 굽히지 않다보니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해 실업자 신세라는 것. 하지만 세상 어떤 좋은 벼슬도 나보단 못할 것이라는 허풍도 가득하다. 분명 돈이 궁한데 돈 이야기는 없다. 다만 호리병을 보내며 가득 채워 돌려보내란다.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는 연암이 자기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박제가에게 급히 절하는 까닭이 ‘술’이었다니.

가난의 설움 중 하나는 먹고 싶은 술조차도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는 것. 빈 호리병을 술로 가득 채워달라는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하면서도, 연암은 어찌나 당차고 호방한지. 박제가는 이 편지의 행간에서 연암의 곤궁함을, 그리고 배고픔까지 읽어낸다. 그의 답장은 이렇다.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 되니 부끄럽습니다. 공방(孔方) 200을 하인 편에 들려 보냅니다. 호리병 속의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양주(楊洲)의 학은 없는 법이지요.” ‘공방’은 네모난 구멍을 지닌 동전이다. 엽전을 200개나 보내면서 연암이 원하는 술은 담아주지 못하는 박제가의 마음. 누구에게도 무릎 굽히지 않는 연암이 자신에게 무릎을 굽힌다면 배도 고픈 것이 아닐까를 걱정해서였을 것이다. 절친한 벗이 끼니도 챙기지 못한 채 빈속에 술을 들이부을까 걱정해, 술 대신 돈을 챙겨 보내는 마음.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는 것도 감동이지만 그것도 모자라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 되어서 미안하다니. 한없이 퍼주면서도 더 주지 못해 안달인 박제가의 애틋한 우정이 느껴진다.

박제가는 분명 박지원의 부탁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거절이 있을까. “양주의 학은 없는 법이지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완벽한 상황은 없음을 가리키는 고사(故事)다. 연암은 ‘술을 채워달라’ 썼는데, 초정은 배고픔과 절박함과 갑갑한 마음까지 읽어냈다. 돈을 준다고 하면 마음 상할까, 공방을 준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가 주고받는 수많은 메시지 속에 숨은 행간의 여백을 읽어야겠다. 공식적인 메시지와 예절바른 사교적 표현 속에 숨겨진 당신 마음의 깊고 쓰라린 행간의 침묵을.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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