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공생 위한 ‘환대연습’ 나서야
일이 많아 주말 밤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는 마감에 쫓기는 일들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잡상인이 노크하거나 학생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늘 자비로웠던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는 나는 그럴 때 참 난감해진다. 그 손님을 환대할 마음이 가난한 까닭이다. 관용의 미덕을 외면하고 가능하면 서둘러 손님을 내보내고 싶어한다. 그 순간 환대는 없다. 손님의 처지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채 나의 상황에만 빠져 환대하지 못하는 나는 필경 산문적인 인간일지 모른다. 그럴 때 “환대 행위는 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떠올린다.
데리다는 현대의 생활세계에서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해 타인에 대한 관용을 중시했던 하버마스를 넘어 환대를 강조한다. 관용도 중요한 미덕이지만, 관용에는 권력을 쥔 편의 시혜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선한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관용에는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문턱이 존재한다. 이 관용의 문턱을 해체하고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 혹은 절대적 환대를 내세운다. “도래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것과 우리의 고유한 것을 주되 그에게 이름도 묻지 말고 대가도 요구하지 말고 최소의 조건도 내세우지 않을 것.”(‘환대에 대하여’)
초대해 베푸는 조건적 환대는 실천 가능하지만, 초대하지 않은 방문자를 무조건 환대해야 하기에, 데리다 스스로도 실천 불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무조건적 환대를 강조하는 것은 ‘도래할 민주정’에의 기대 때문이다. 환대라는 주제를 위해 이방인 문제를 먼저 다룬 데리다는 이방인에게 문호를 완전히 개방해 진실로 환대하지 않는 생색용 관용만으로는 진정한 민주정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조건적 환대가 그토록 중요하다.
여러 이민족의 교섭과 갈등이 빈번했던 유럽의 전통을 잘 아는 데리다가 이방인의 주제를 민감하게 다루며 환대를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며 미래의 소망을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서 유럽 곳곳의 테러 현장 풍경을 보며 이방인과 환대에 대한 데리다의 관심에 거듭 눈길이 간다. 물론 그의 말대로 무조건적 환대는 당장 실현 가능한 게 아니다. “환대는 없다.” 그러나 진실한 평화와 공생을 위한 ‘환대 연습’은 요긴하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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