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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광복과 조선왕실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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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8-16 21:55:00 수정 : 2016-08-16 2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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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랑에 왕족들 기구한 말년
낙선재에서 쓴 덕혜의 낙서 가슴 찡해
이틀 전인 15일은 광복된 지 7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광복절이 있는 달이어서 그런지 8월은 어느 달보다 조국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1945년 8월15일은 조선 왕실의 인물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 같다. 최근 ‘덕혜’라는 영화가 상영되면서 일제 강점 시기를 살아간 조선 마지막 공주의 비극적인 삶과 왕실의 모습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고 있다.

광복 때까지 생존했던 대표적인 왕실 인물은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1897~1970)과 영친왕 형인 의친왕 이강(1877~1955), 그리고 고종 황제가 환갑 때 낳은 늦둥이 딸 덕혜옹주(1912~1989)였다.

영친왕은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됐으나, 바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에 가게 된다. 형식상은 유학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인질의 몸이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고 순종 황제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자, 황태자였던 영친왕 역시 왕세제로 격하됐다. 1920년 4월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왕족 마사코(한국명 이방자)와 정략 결혼했다. 영친왕은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1945년 광복이 돼 귀국하고자 했으나, 조선 왕실에 대해 부담감을 느낀 이승만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덕혜옹주 역시 1925년 13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출국됐고, 1931년에는 대마도 백작 출신의 일본인 쇼 다케유키와 결혼을 하면서 많은 조선인의 분노를 사게 했다. 광복 후 덕혜옹주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46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영친왕과 덕혜옹주는 박정희정부 시절 마침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귀국 후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왕실의 위엄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었다. 공화정으로 변한 세상에서 왕실을 지켜 줄 사람도 없었고, 이들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영친왕은 1970년, 덕혜옹주는 1989년 고국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영친왕의 형이자 고종의 셋째아들인 의친왕은 1900년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일본의 조선 침투에 저항했다. 1910년 이후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고,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을 계획했으나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강제 송환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영친왕과는 달리 끝까지 항일 정신을 지켰다는 점에서 조선왕실의 마지막 자존심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의친왕에게도 광복은 별다른 기회가 되지 못했다. 변변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현재의 서울 성북구 성락원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55년 79세로 생을 마감했다.

519년간 존속했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합병을 당했고, 광복이 됐지만 공화국이 된 세상에서 조선왕실 사람들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었다. 역사의 격랑 속에 휘말리며 불우한 삶을 살아갔던 조선왕실의 마지막 사람들에게 광복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덕혜옹주가 귀국 후 정신이 맑을 때 낙선재에 썼다는 낙서 한 장은 묘한 여운을 던져주고 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신병철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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