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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해방’ 시대… 마오 ‘대공포 정치’의 서막

입력 : 2016-08-19 20:41:25 수정 : 2016-08-19 20: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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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1949년 국공내전 승리로 ‘해방’
“농민·노동자 나라 세웠다” 환호도 잠시
토지개혁 앞세워 200만명 지주 생매장·살해
반대파 모조리 숙청… ‘그들만의 나라’ 골몰
프랑크 디쾨터 지음/고기탁 옮김/열린책들/2만5000원
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프랑크 디쾨터 지음/고기탁 옮김/열린책들/2만5000원


오늘의 신중국을 수립한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 거둔 승리를 ‘해방’이라고 칭하곤 한다. 부패한 장제스 국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노동자, 농민의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일련의 비극적인 사태는 해방이 의미하는 평화나 자유, 정의와는 무관했다.

네덜란드 젊은 역사학도가 쓴 ‘해방의 비극’은 1945∼1957년의 13년간 벌어진 일들을 추적한다. 그간 마오쩌둥이 건설한 초기 신중국을 일컬어 해방된 인민의 나라라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해왔다. 이런 시각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유럽 진보학자들에게 지배적인 견해였다. 한국의 진보 좌파 학자들도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중국공산당의 기록 보관소 등에서 본인이 비밀리에 입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실체를 전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마오쩌둥 해방에 초점을 맞춘 논문이 주류여서 본 모습을 제대로 전한 것이 없었다고 했다. 저자는 “당시 문서와 보고서를 미루어볼 때 마오쩌둥과 공산당에게 인민이나 평화는 없었으며, 오로지 정권을 탈취해 그들의 나라를 만드는 데 골몰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에 입성한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열린책들 제공
1945~1949년 국공 내전 당시 민간인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예컨대 만리장성 북쪽의 광활한 만주 벌판에 있는 창춘은 지옥의 도시였다. 린뱌오 사령관은 1948년 무렵 5개월 동안이나 창춘을 봉쇄했다. 도시 전체를 빙 둘러 거의 50m 간격으로 보초를 배치하고, 대공포와 중포로 밤낮 포격을 퍼부었다. 인민들이 탈출하면 사살하거나 체포했다. 포위 기간 중 최소 16만여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이런 초토화 작전의 여파로 다른 도시들도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했다. 이 덕에 인민해방군은 베이징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각 도시의 군중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해방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대공포 시대가 도래했다.

농촌에서는 토지 개혁이 단행됐다. 농부들은 장제스를 몰아낸 대가로 약간의 땅을 분배받았다. 반면 200여만명의 지주들은 생매장되거나 결박된 채 분시(分屍) 또는 교살됐다. 어린이 지주들도 도륙당했다. 마오쩌둥은 1000명당 한 명을 죽이도록 하달했지만 많은 지역에서 살인이 횡행했다. 광시(廣西)성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년 동안 4만6200명이 살해되거나 처형됐다. 할당량의 3배 가까운 수치였다. 죽일 사람을 할당량으로 정한 것은 인류 초유의 비극이었다.

1952년 7월 중국 광둥성의 한 마을에서 인민 재판을 받고있는 한 지주의 모습. 그는 곧 등에 총을 맞고 처형됐다.
공산당 정권이 폭력과 위협만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 역사는 약속과 약속의 파기로 점철됐다.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잡기 전까지 구애 작전을 펼쳤다. 레닌과 볼셰비키당처럼 농민에게는 땅을, 소수 민족에게는 독립을, 지식인에게는 자유를, 사업가에게는 사유 재산의 보호를, 노동자에게는 높은 생활 수준을 약속했다. 그러나 마오는 집권 이후 10여년간 애초 약속들을 하나씩 파기했다.

공산당은 1956년 구멍가게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영 기업을 국유화했다. 농부들은 이동의 자유를 잃었다. 지역 공산당 간부의 명령만 기다리는 채무 노동자로 전락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지 10년 만에 반대파는 모조리 숙청당했다.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이나 집단은 대부분 사라졌다. 모든 약속이 깨졌음에도 공산당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상주의자였고 기회주의자였으며, 폭력배도 있었다. 공산당원의 가족들은 새로운 이익집단으로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저자는 “과연 마오쩌둥은 해방을 외쳤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캄보디아의 폴 포트, 북한의 김일성 등 다른 공산주의 독재자들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마오쩌둥의 집권 후 수천만 명이 대기근으로 죽든지, 숙청돼 생매장됐다”면서 “자료를 검토한 결과 마오쩌둥의 집권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20세기 최악의 폭정 가운데 하나였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6·25전쟁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힌다. “연인원 400여만명을 한국에 파병해 100여만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의 최대의 승자는 마오쩌둥이었다”면서 “파병된 하급 출신 병사들은 전투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에 죽었지만,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지금도 미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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