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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독립군 기둥 된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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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8-25 21:54:06 수정 : 2016-08-25 21: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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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난성 뤄양시 시궁구 나시시로로 18호. 이곳은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져서는 안 될 곳이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이 설치된 곳이기 때문이다. 1932년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 정부가 들어설 무렵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투탄의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는 한국인의 독립투쟁 역량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장제스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장제스는 김구와 만나 낙양군관학교 안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중국 허난성 뤄양시에 있는 낙양군관학교 터. 중국 주석 장제스와 김구의 합의로 한인특별반이 설치된 곳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임시정부는 한국독립군총사령관 지청천을 책임자로 정했다. 그리고 상해·남경·북경·천진 등 여러 지역에서 모집한 한국인 청년 92명이 입교했다. 이들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로 편성됐다.

이때 대장은 이범석, 교관은 오광선·조경한·윤경천 등이 맡아 학생들의 정치·군사훈련을 직접 담당했다. 교과목은 조선 혁명에 관한 훈화와 사회학·세계경제·특무공작·경제학·정치학·보병조전 및 소총·기관총 조립법과 실과·교련 등이었다. 한인특별반은 1935년 4월 1기생 62명을 배출시켰다. 애석하게도 한인특별반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낙양군관학교는 우페이푸(1874∼1939)군벌의 병영 내에 있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우페이푸 군벌의 사령부와 관사 등이 남아 있다. 뒤편에는 6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자리가 우페이푸 군벌의 병영이 있던 곳이다. 그 앞에 있는 건물은 해방 후 미사일연구소 창고자리로 쓰였다고 한다.

우페이푸사령부는 대지 1000㎡, 건평 600㎡의 건물로 현재 ‘문물중점’으로 지정돼 있다. 우페이푸 웨이리황의 관사는 사령부 맞은편에 있으며, 단층 건물로 지하에 1㎞ 떨어진 낙양비행장과 연결되어 있었던 벙커가 있다. 관사에 붙어 있는 건물은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가 머물렀던 숙소다. 이곳은 우리의 독립운동사뿐 아니라 중국의 근대사에서도 의미 있는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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