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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한인 자긍심 넘치는 카자흐 ‘홍범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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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01 22:23:43 수정 : 2016-09-01 22: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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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는 러시아 원동과 중국 동북지방의 빨치산부대의 전설적 지휘자이며 한국의 탁월한 애국자이자 인민 영웅으로 1937년에 크질오르다에 온 홍범도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89년 5월 26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는 ‘고려사람 문화기간’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일 카자흐스탄 작가동맹 조선인분과협의회장은 홍범도거리 현판식을 갖고 이렇게 말했다. 카자흐스탄에 우리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기게 된 것은 적잖은 의미를 갖고 있다.

홍범도 장군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둔 주인공이다. 장군이 이끌던 만주 대한독립군은 1920년 6월6일 오후 1시 중국 지린성 투먼시 인근 봉오동 협곡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두만강을 넘어 협곡까지 온 일본군 500여명은 이곳에서 700여명의 독립군에게 포위당했다. 3시간가량의 전투 끝에 전사한 일본군은 157명. 중상자도 200명이 넘었다.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거리. 홍범도 장군(작은 사진)은 독립운동사에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둔 주인공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장군은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 9살 되던 해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한 장군은 의병운동에 자극을 받아 1907년 함경북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한·일강제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해 국내 일본군을 수차례 급습했다. 장군은 같은 해 9월에는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전했다. 이후 일제의 파상 공세로 러시아로 간 그는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독립군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강제 무장해제를 당하는 ‘자유시사변’을 겪었다. 1937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됐다. 그는 러시아 연해주 수청 슈코토브 구역 ‘레닌길’ 콜호스에서 살다가, 1937년 강제이주를 당하여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주(당시는 침켄트주)의 야니쿠르칸 구역 사나리크촌소비에트에서 살았다. 이후 1938년 4월 초에 크질오르다시의 스테프나야 거리에 집을 얻어 1943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장군의 유해는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74)씨가 지금도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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