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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바람길] 아낙들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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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02 21:52:23 수정 : 2016-09-02 21: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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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 몇 주 사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인과 사이버 대화에 빠져 있다. 말을 던지면 능력 있는 탁구선수가 절묘하게 리시브하듯 말이 다시 넘어와 한두 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리곤 했다. 그는 이미 계절과 계절 사이의 길목을 통과해 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 길목을 남녀를 막론하고 거쳐야 하는 갱년기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느 한 시기를 말하는 표현임이 분명하니 생의 한 계절을 일컫는 용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다.

러시아에는 실제로 계절과 계절 사이의 짧은, 청명한 햇빛이 아름다운, 거리에 나서면 맑은 공기 가루들이 피부에 날려와 부딪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는, 열흘 남짓 지속되는 숨은 계절이 있다. 이름 하여 ‘바비에 레토’, 직역하면 ‘아낙들의 여름’이라는데 한랭하고 긴 겨울과 짧고 서늘한 여름을 통과하는 전형적인 대륙성기후인 러시아 날씨에서 여름과 가을로 이어지는 어느 시점, 어쩜 이럴 수 있나 싶게 청명하고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기간을 일컫는다고 한다. 그는 바야흐로 자기 인생의 ‘바비에 레토’가 찾아오는 건 아닌지 이즈음 잠시 설레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는 묘한 설렘과 쓸쓸함이 늘 교차하곤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는 도전의식이나 은근한 기대감 혹은 설렘이 깔린다. 은성하고 강렬하고 뜨거운 열탕에서 벗어나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가을로 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여름을 향해 갈 때의 기대감이나 설렘보다는 우선멈춤 표지판 앞에 섰을 때처럼 주춤거리게 된다. 바야흐로 끝을 향해 가는 여정을 직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수확도 해야 하고 감사의 제도 올려야 한다. 어찌 보면 가장 충만한 누림을 자축하고 만끽할 계절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것이기도 하다.

장석남의 초기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은 제목만으로도 압도적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는 이 시점에는 간신히, 겨우, 아무도 그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움이 사라진 공간은 삭막하겠지만 아직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평화와 희망은 유효한 것일까. 지금 그는 계절과 계절 사이의 난간에 서서 지나온 계절과 다가올 계절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무엇을 놓고 왔고 다시 무엇을 찾아가려는지 막막하지만 아직 그리움의 꼬리는 만져진다고 했다. 계절의 길목에서 생의 난간을 부여잡고 선 이들 모두에게 짧아도 좋으니, ‘바비에 레토’가 찾아들기를 바란다고 그는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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