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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빌려줄 몸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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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25 21:50:36 수정 : 2016-09-25 21: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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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1970~)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結球)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 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걸

처음자리에 길은 없다는 거였다




김영남 시인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김수영)” 필자가 좋아하는 이 시론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김선우 시인이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어떤 여성 시인에게서 느끼지 못한 힘과 뜨거운 열정이 전달된다.

김선우 시인의 대학 시절 소망이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나. 하여 필자는 이 시인의 이름을 만날 때마다 체 게바라 모자를 쓴 김선우를 떠올린다.

인용시는 ‘배추’라는 소재에 시인의 생각이 개성적으로 잘 반영되었음을 본다. 가식 없는 내용이고 시인의 생각과 인품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따뜻하다. 김수영 시론처럼 온 몸으로 살고 온 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혁명가 정신이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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