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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철학 없이 ‘노벨과학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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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26 23:12:51 수정 : 2016-09-26 23: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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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이 뒷받침돼야
과학기술도 조화롭게 발전
한국은 기초보다 응용에 치중
남 따라가선 선진국 도약 못해
얼마 전,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이 과학재단을 만들고 사재 3000억원을 내놓았다는 미담이 화제를 끌었다. 한국만큼 선진화된 사회에서 재벌이 자신이 획득한 재산을 사회 환원차원에서 출연한 것은 서 회장 말고도 더러 있었다. 화제의 초점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서경배 과학재단’을 만들고, 그것도 왜 특정분야인 ‘과학재단’이냐에 있었다.

여기에는 그의 문제의식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미래에 대한 그의 전망과 구상이 들어 있다. 필자는 몇 해 전 세계일보에 연재한 ‘박정진의 차맥(茶脈)’의 애독자였던 서 회장의 초청을 받아 아모레퍼시픽 간부들을 대상으로 특강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서 회장의 겸손한 태도와 인문학적 교양과 지식에 포스를 느끼면서 그가 언젠가는 우리 사회를 위해 크게 공헌할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서경배 과학재단은 연구개발이 아니라 순수과학을 지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인재를 배출할 것을 목표로 한다. 근대 서구문명의 핵심에는 과학이 있다. 우리는 흔히 과학기술이라는 용어를 함께 쓰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기술은 근대 이전인 신석기시대에도 있었다. 과학이라는 것은 서구문명의 산물이고, 근대의 산물이다.

과학에는 물리학을 비롯하여 생물학, 생화학, 그리고 진화론까지 포함하면서 지금도 세분화를 더하고 있다. 중세까지 기독교에 의존해서 사회를 이끌어온 서양은 근대에 들어 과학을 만든 후에 다시 칸트에 의해 이성을 기초로 도덕론을 만들고, 기타 여러 분야를 체계화하고 다듬어갔다. 이에 비해 동양은 기술은 있었지만, 유교(주자학)의 도덕론(도덕적 합리주의)에 머문 나머지, 과학(과학적 합리주의)에서 뒤져서 근대에 서양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점에서 백여 년 전에 동아시아 삼국이 벌인 동도서기(東道西器, 한국),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은 서세동점의 슬픈 가락이 되었고, 오직 일본만이 같은 의미의 화혼양재(和魂洋材, 일본)로서 근대화에 성공하고, 선진국 대열에서 일본식 제국주의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우리에게는 일제식민이다. 일본은 나름대로 서양과학문명과 서양철학 등 근대적 문물제도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체득에 성공함으로써 동양문화의 전통을 지니면서 서구화에 성공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아마도 서 회장이 과학재단을 만드는 데는 이러한 근대문명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고, 실지로 아모레퍼시픽이 화장품 업계에서 중국시장을 지배하고, 프랑스 등 서구시장의 공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과학기술개발 정신에 힘입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과학기술분야에서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일본은 과학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막말로 받고 싶지 않아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기술 모두에서 최전선에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과학기술은 기초보다는 응용에 치중해 있고, 특허기술에 치중하는 경향은 아직도 근본적인 창조기술이라기보다는 조립기술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기술사회 경향’은 반드시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인문학에 악영향을 미쳐 이제 숫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쓰는 일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선진국에서 개발한 기술을 도입하여 다시 조립하여 내놓은 수준은 중진국까지는 될 수 있어도,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조건이다.

남을 따라가서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이게 바로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장벽이며, 이것을 넘어서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창조경제’를 외쳐도 그것을 실천할 문화적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고 만다. 선진국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과학기술과 문화적 기초와 교양이 풍부하면 저절로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서 회장의 미담을 들은 며칠 뒤 필자는 우연히 한국철학을 대표하던 열암 박종홍 선생을 기리는 ‘열암학술상’이 큰 상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재원고갈로 지난 몇 해 동안 수상자를 내지 못하고 폐지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철학 상들도 마찬가지 처지라는 것이다. 철학하는 풍토가 마련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자생철학과 창조과학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 철학볼모지에서 진정한 과학이 탄생할 수 있을까. 서양의 과학은 서양의 철학이 만들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물론 과학철학에 지배당하는 철학 자체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우선 철학할 수 있어야 과학을 할 수 있고, 과학을 할 수 있어야 철학할 수 있음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과학기술사회에서 앞서가야 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지만 갈 길이 바쁘다고 철학도 없는 사회에서 과학이 될 수는 없다. 과학과 철학은 한국문화의 주체성 확보와 자생력을 기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두 수레바퀴와 같다. 그렇다고 서양철학을 앵무새처럼 외우고, 스스로 철학하지도 않고, 서양철학을 선교하는 공리공론의 철학을 해서도 안 된다. 이제 스스로 과학하고 철학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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