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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길이 옳더라도 뻔한 문제 외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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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29 00:53:18 수정 : 2016-09-29 00: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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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으로 사회 큰 변화
위법 해석 놓고 혼란도
문제 알고 통과시킨 국회 책임
손볼 건 손보고 고칠 건 고쳐야
고향에 홀로 계시는 노모가 늘 걱정이다. 칠순을 넘기셨다고 얘기하면 주변에서는 “아직 정정하시네”라며 무심해한다. 평생 논밭에서 그을린 주름에 제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 허리며 무릎이며 성한 곳이 없다. 5년이 훨씬 지나긴 했으나 위암 수술까지 받았다. 육류나 생선 따위는 일절 손도 대지 않는 식성이라 기력이 좋을 리 없다. 건강이 염려돼 고기를 권해 봐도 매양 헛일이다.

혹여 노모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급히 받았다고 치자. 고향 근처 병원에서는 위중한 병이라고 한다. 자식이라면 누구나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시려는 게 인지상정이다. 주변에 수소문해 보니 A대학 병원이 그쪽 분야 수술을 잘한다고 한다. 하나, 노모를 당장 그 병원으로 모실 수 없다. 부탁했다가는 ‘김영란법’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B종합병원은 그 법에 적용되지 않으니 거기에 부탁해 보란다.

박희준 논설위원
A병원은 B병원과 달리 사립대 부속병원이다. 이 병원 의사나 직원은 김영란법에서 규정한 ‘공직자 등’에 해당한다. 청탁을 받고 수술날짜를 잡아줬다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노모를 위해 청탁한 아들도 3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부모나 자녀는 ‘제3자’이기 때문에 처벌 예외인, ‘자신을 위한 청탁’에 해당하지 않는다.

어제부터 시행된 김영란법은 세상을 이렇게 바꾼다. 대다수 국민은 이 법이 ‘잘난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뿐이고 자신은 무관한 걸로 착각하고 있다. 그렇게 알고 있다면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공직자 외에도 ‘공직자 등’에 포함된 사립학교 교직원과 언론사 임직원까지 직접 대상자가 240만명, 배우자까지 400만명이다. 주변에 있는 10여명 중 1명인데, 이들과 접촉할 일이 정말로 없을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니, 3만원짜리 식사면 진수성찬 아닌가.” “5만원 넘는 선물, 10만원 초과 경조사비 받을 일 있나.” 식사와 선물, 경조사비가 문제가 아니다. 부모의 입원을 부탁하려고 해도, 보충역 판정을 받은 아들을 현역으로 군에 보내려 청탁해도 걸린다. 대학병원이나 학교, 언론사의 비정규직 경비원이나 안내원에게 명절 때 고마움의 뜻으로 건넨 선물도 문제 될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문제는 어느 누구도 어떤 행위가 법 위반인지를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법, 더군다나 형사처벌을 하는 법이라면 내용이 명확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행위가 죄가 될지 말지를 인식할 정도로 돼 있어야 한다. 10만원 이하 벌금이나 구류, 과료로 가볍게 처벌하는 경범죄처벌법도 쓰레기 투기, 노상방뇨, 자연훼손, 음주소란, 구걸행위 등 금지행위를 나열해 놓고 있다.

국민권익위에 구체 사례의 위법 여부를 물으면 “그럴 수도 있다. 정확한 건 법원 판례가 쌓여봐야 안다”고 한다. 아니,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영국 같은 불문법의 나라였던가. 버젓이 법을 만들어 놓고서 법원에 가서 판단을 받아봐야 안다니! 판사들이나 변호사들조차 헷갈린다고 하지 않나. 권익위가 언론용으로 배포한 김영란법 관련 매뉴얼만 205쪽에 이른다. 늘 끼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청탁이… 부정한지 아닌지는… 사후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법령에 안 되는지 아닌지를… 국민이 다 입법박사도 아니고 몰라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요, 세상에 법을… 정말 이것 속기록에 다 남겨야 돼.” 2014년 5월23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서 김기식 전 의원과 이성보 전 권익위원장 간에 오간 대화다. 국회는 문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너무 무책임하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껏 걸어보지 않은 길에 접어들었다. 청렴사회로 가는 길이다. 다소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뻔히 보이는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9·28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길은 정해졌다. 불분명한 건 명확하게 고치고 포털사이트가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문제점 등은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박희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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