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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의 리더십… 시진핑의 ‘길’이 되다

입력 : 2016-10-01 03:00:00 수정 : 2016-09-30 19: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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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지음/민음사/각 2만2000원∼2만5000원
개혁과 개방 -1976~1982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조영남 지음/민음사/각 2만2000원∼2만5000원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10여년간의 중국정치 연구 결과를 3권의 책으로 펴냈다.

조 교수는 우선 객관적으로 중국의 실체를 바라보길 기대한다. 그간 미국 일본 등 서구 스타일의 학자들은 대부분 비판적으로 중국을 조망해 왔다. 국내외에 널리 퍼진 중국정치에 대한 시각은 편향돼 있었다.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에 모인 수만명의 학생들이 민주개혁을 외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뒤에 학생들이 세운 흰색의 ‘민주의 신’ 동상이 마오쩌둥 사진을 가리고 있다. 왼쪽은 덩샤오핑.
민음사 제공
서구에서는 대부분 1976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혼란을 예상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사태 이후엔 피폐한 공산당 독재국가를 연상했다. 1998년 금융위기에는 중국 경제의 후퇴와 민생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 예측은 대부분 빗나가 희망단계에 그쳤다. 지금 중국은 경이로운 경제적 성과를 내면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한다.

저자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경제적 성공의 요인을 촘촘히 들여다본다. 중국의 무엇이 지금의 성공을 이뤘는지, 핵심 요인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곧 향후 중국을 예측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파벌과 투쟁 -1983~1987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2
1권 ‘개혁과 개방’에서는 통치 엘리트들을 이끈 덩샤오핑의 리더십을 조망한다. 2권 ‘파벌과 투쟁’에서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정쟁이 과거 마오쩌둥 시대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본다. 3권 ‘톈안먼 사건’에서는 덩이 어떻게 반대를 극복하고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냈는지 분석한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패한 공산당 일당 독재의 리더십과 경제 성장을, 중국은 동시에 이뤘다. 저자는 그 요인을 세 가지로 압축한다.

덩을 중심한 강력하고 통찰력 있는 정치 리더십이 첫째이고, 효과적인 정치제도의 수립과 유능한 당정 간부가 있었으며, 적절하고 실현 가능한 정책의 선택이다.

마오쩌둥 사후 혁명 원로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덩의 개혁개방을 지지했다. 덩은 마오쩌둥의 신임으로 총서기에 오른 화궈펑을 빠른 속도로 물리친다. 이어 덩은 외자를 끌어들여 전면적인 개혁개방에 나설 수 있었다. 덩의 핵심 전략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당-국가 통제’였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큰 나라를 통제하기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효율적이었다.

톈안먼 사건 -1988~1992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
1983년 화궈펑 체제가 와해된 이후, 1987년까지 개혁개방 노선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개혁파는 첨예하게 대립한다. 파벌의 주체는 화궈펑, 덩샤오핑, 왕둥싱, 예젠잉, 천윈, 리셴녠 등이었다. 경제 정책, 정치 이슈에 대한 입장차에 따라 파벌은 헤쳐모여를 거듭했다. 그러나 개혁기의 파벌투쟁이 권력투쟁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마오쩌둥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지도자를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여 숙청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류샤오치와 펑전, 덩샤오핑은 그렇게 밀려났다.

그러나 개혁기에는 달랐다. 노선이 다른 파벌들이 서로 경쟁했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덩샤오핑과 천윈 간의 관계가 그랬다. 천윈은 덩의 개혁개방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덩을 정적으로 여겨 몰아내려 한 적은 없었다. 물론 후야오방이 보수파의 공격으로 사라졌지만 모든 파벌투쟁이 권력투쟁에 골몰한 것은 아니었다.

덩은 1980년대 말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를 위시한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그룹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즉각 지식인과 학생들의 공분을 샀다. 1986년 11월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촉발시켰다. 정치민주화를 내세운 후야오방 실각 이후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자오쯔양 역시 적극적인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덩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치개혁은 민생문제 해결 이후 점진 추진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확고했다. 다시 말해 덩은 권력 독점을 위해 공산당 일당제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덩은 사회주의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덩은 “사회주의 국가에는 큰 장점이 하나 있다. 어떤 일이든 한번 결심하면 바로 결의가 나올 수 있고, 견제받지 않고 즉각 집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책 결정과 집행의 효율성 면에서 일당체제가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덩은 서구식 시스템, 즉 견제와 균형의 삼권분립, 다당제, 의회제를 몹시 싫어하고 경멸했다. 그래서 덩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대로 도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 시진핑 정권은 이 노선을 충실히 따르면서 반서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덩은 1970년대 후반 ‘설계도 없는 집 짓기’로 불린 개혁개방 정책을 구체화했다. 톈안먼 사건 이후 보수파의 정국 주도권 장악을 남순강화로 극복했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국봉쇄를 이겨냈다.

저자는 덩샤오핑 시대와 오늘날 중국을 “위인은 떠났지만 유산은 영원히 남는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우리 학계에는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현상’, 더 나아가서는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않으려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편향된 연구 경향을 바로잡고 그동안 부족했던 거시적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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