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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법조타운] 기분 좋게 거절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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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30 20:12:27 수정 : 2017-02-03 19: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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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의 핵심은 거절
연줄 얽매이다간 큰코 다쳐
좀 미안하고 비겁해 보여도
이제 안 되는 건 안 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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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7일 오후 10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현악4중주 실내악단 ‘노부스 콰르텟’의 쇼스타코비치 작품 협연이 막 끝났다. 역시나 객석의 박수는 좀처럼 멎지 않았고 앙코르 연주가 4차례 더 이어졌다.

‘청중의 계속되는 앙코르 요청을 어떻게 거절할까.’ 못내 궁금했는데 4번째 앙코르 공연을 마치고 다시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이 모두 빈손이다. 방금 전까지 들고 있었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는 몽땅 무대 뒤 대기실에 놓고 나왔다. ‘이제는 뭐 악기도 없고 더 연주할 수가 없네요’라는 뜻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한국 클래식음악을 대표하는 젊은 연주자들의 애교 섞인 행동에 관객은 미소를 머금고 삼삼오오 자리를 파했다.

요즘 화제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규정한 ‘부정청탁’의 범주에 앙코르 요청은 물론 포함되지 않는다. 공연 이야기를 꺼낸 건 거절의 방식 때문이다. 김영란법의 핵심은 ‘거절’이다. 제때 제대로 거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데 그냥 딱딱하게 “절대 안 된다”고 해버리면 상대방이 불쾌해할 수 있다. 정중하고 재치 있는 거절은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뚜렷한 의사전달이 가능하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29일 서울 종로구 혜화초등학교 정문에 학부모 물품 보관함이 마련되어 있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극히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남의 부탁을 똑부러지게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엮인 이들의 부탁은 더더욱 그렇다. 대검 중수부장, 서울지검장 등을 지낸 김경회 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은 평검사 시절인 1970년대 초반 마산지청 발령을 받았다. 마산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그곳에서 다닌 김 전 원장은 ‘고향 사람들을 엄정히 수사할 수 있을까’, ‘지인들의 온갖 부탁은 또 어떻게 대처할까’ 등 고민이 적잖았다.

김 전 원장이 선택한 것은 과감한 ‘기선제압’이었다. 부임 직후 고교동창 등과 가진 첫 술자리에서 나름의 기준을 선포했다. ‘여기 모인 친구들 본인이나 부모, 자녀에 관한 문제는 내 권한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성심성의껏 돕겠다. 하지만 그 외의 일로 내게 청탁하거나 밖에서 내 이름을 팔고 다니면 그날로 절교하겠다.’ 좀 매정하다고 여긴 지인도 물론 있었겠으나 대다수 참석자는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 전 원장은 훗날 회고록에서 “친구들이 약속을 잘 지켜준 덕분에 고향에 근무한 2년6개월 동안 아무 뒷탈이 없었다”고 말했다.

법조계의 전관예우 관행이 그토록 비판을 받으면서도 근절되지 않는 건 그만큼 거절이 어렵기 때문이다. 젊은 판검사들은 “법원장이나 검사장 출신 전관 변호사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나중에 그분들이 내 직속상관 또는 인사권자와 만난 자리에서 나에 관해 얘기하며 ‘그 친구, 똑똑하긴 한데 태도가 영…’이라고 할까봐 거절을 못하겠다”고 하소연한다.

김영란법이 시행됐으니 이제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행여 걱정이 되거든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공손하게 사과하면 될 일이다. 서양의 어떤 나라들은 사과가 곧 법적 책임 인정을 뜻한다고 하나 한국은 ‘죄송’을 100번 써도 법적 책임과 무관하다. 그냥 자존심만 조금 숙이면 된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그래도 대놓고 거절하기 어렵다면 “내 소관이 아니다”며 공을 남한테 떠넘기는 게 상책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원수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대령 계급장을 달고 프랑스 전장에서 독일군과 싸울 때의 일이다. 훗날 별을 5개나 단 맥아더이지만 그때는 별 1개가 몹시 탐났던 모양이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미국 국방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의 준장 진급을 간곡히 청탁하며 “머지않은 장래에 장관 부부를 뵙게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던 장관은 당장 집에 쳐들어와 현금 다발이라도 안길 듯한 맥아더 어머니의 기세에 화들짝 놀라 답장을 썼다. “프랑스에 주둔하는 미군 원정군에 관한 모든 승진 상신에 대해 저는 현지 사령관에게 전권을 위임해 놓고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선택으로 개입했을 때 초래될 불협화음과 불화는 가늠이 안 될 정도입니다.”

좀 비겁하고 무능해 보일지 몰라도 원칙은 원칙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김영란법이 활짝 연 새 시대, 이제 ‘거절’만이 살길이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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