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위기 아닌 위기가 무릎에 찾아왔다. 가을을 맞아 마라톤을 시작한 것이다.
많게는 5만원까지 참가비를 내야 하니 돈이 아까워서라도 ‘강제 뜀박질’을 하게 해주는 마라톤은 나름 오래 곁에 두고 지낼만 한 취미였다. 더욱이 최근 마라톤 대회는 다른 대회와의 차별화를 위해 깜찍한 아이디어를 선보이는 경우도 많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최근 참여한 한 마라톤 대회에선 코스 내 한강굴다리에 휘황찬란한 조명을 달고 음악을 틀어 클럽 분위기를 연출했다. 덕분에 다른 참가자 수백명과 함께 굴다리 안에서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면서 달리는 괴상망측한 경험도 했다.
김승환 사회부 기자 |
한 달여 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한 대회에선 일부 참가자들이 다른 참가자와 손목에 끈을 묶고 함께 달렸다. ‘제2회 시각장애인돕기 함께 뛰는 어울림 마라톤대회’라는 이름이 붙은 대회였다. 마라톤 초심자인 나는 평소 7∼8㎞는 가볍게 뛰니깐 조금만 더 무리하면 될 거라는 생각으로 10㎞ 코스를 택한 터였다. 대회 주최 측에서 나눠준 기록 측정 칩의 이용법을 몰라 열심히 뛰고도 기록증명서도 발급받지 못한 날이었다.
7㎞ 넘어가는 지점에서, 코스 부근에 구급차가 대기 중인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흉한 몰골로 아무 데나 주저앉아 얼굴을 숙인 채 헉헉댔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렸다. 벌어진 입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니 시각장애인과 끈을 묶고 함께 달린 한 40대 남성이 생수병을 건넸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한 채 일단 물을 들이켰다.
숨을 돌리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저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참 대단하시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 남성은 옆에 선 시각장애인을 가리키며 “저도 마라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힘든데, 이 친구랑 함께 뛰어보려고 한 달 전부터 연습해서 그나마 좀 나아진 편”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건 몸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힘든 중에도 머리를 땡 하고 치는 느낌이 있었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는커녕 본인 사정만 따지며 무리하게 한 농민의 시신을 부검하겠다는 검경이나 상대 당과의 협조 따윈 선택지에 없는 듯한 국회를 떠올리면 더욱 그분의 말이 각별했다.
내년 3회 대회는 그분을 떠올리며 나도 시각장애인과 함께 뛸 생각이다. 우수하지 못한 몸뚱이인 탓에 내년까지 마라톤을 취미로 하고 있을지 장담은 못하지만 그분 말대로 몸이 아니라 마음이 더 중요하니 약속 아닌 약속을 남발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김승환 사회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