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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정조 화성행차, 타임머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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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12 10:25:41 수정 : 2016-10-12 10: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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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가장 장엄했던 국가 이벤트
충효사상 앞세워 치국의 기틀 다져
10월은 축제의 계절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여러 지역에서 많은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한 축제가 연고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행사는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해 단행한 화성 행차의 재현이었다. 정조의 화성 행차 재현은 이제까지 몇 차례 거행됐지만, 이번 행사는 서울시와 수원시가 협력해 최대 규모로 진행했다.

1795년 윤2월 9일 새벽,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으로 향했다. 1795년은 정조에게 각별한 해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았고, 어머니와 동갑인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더라면 함께 회갑 잔치를 올려야 하는 해였다. 또한 1794년에 공사를 시작한 화성(華城)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어서 직접 공사 현장을 둘러볼 필요도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돼 가는 시점에서 정조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성대하고 장엄한 행사를 추진했다.

정조의 행차는 8일간 계속됐다.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지만, 미리 현장에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한 인원까지 포함하면 전체 규모는 6000여명에 달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행렬은 현재의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배다리를 건넜고, 저녁에 시흥행궁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 날에는 시흥을 출발해 이날 저녁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했다. 셋째 날에는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화성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별시를 거행했다. 넷째 날 아침 부친의 무덤인 현륭원에 참배를 했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씨의 슬픔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정조는 조급하고 당황해했다. 오후에는 화성의 지휘본부인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했다. 다섯째 날에는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어머니 회갑연이 거행됐다. 잔치에 공연된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된 음식의 세세한 내역은 현재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섯째 날에는 화성의 곤궁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날 정조는 부친의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갯길에서 계속 걸음을 멈추었다. 이후 이 고개는 ‘지지대(遲遲臺·걸음이 더뎌지고 머뭇거리게 된다는 뜻) 고개’라 불렸다.

정조는 화성을 오가는 길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이를 호소하게 했다. 백성들의 민원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노인을 초청해 효를 강조하는 한편,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수도권의 방위 체제를 점검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부모에 대한 효심을 다한다는 의미 이외에, 정조가 그동안 이룩했던 왕의 위엄을 과시하고, 신하와 백성의 충성을 결집시켜 개혁 정치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담겨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알고 화성과 화성행궁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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