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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권준 독립 투혼 키운 황포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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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13 20:06:42 수정 : 2016-10-13 20: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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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구 상리공원에서는 지난 10일 권준 장군 기념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권준장군기념사업회’와 육군 50사단 주관으로 열린 이날 제막식에는 200명의 시민과 장병들이 참석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육군 제50보병사단 사단장인 백인(百忍) 권준 장군(1895~1959)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광복회에 참가하면서부터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의열단에서 군자금 조달과 폭탄제조 등의 임무를 맡아 국내 폭탄투척 의거를 지원했다.

권준 장군이 군사훈련을 받고, 나중에 교관을 맡았던 후베이성 우한(武漢)시에 있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이곳에서의 군사훈련이 국군 창설의 기초가 되었다.
독립기념관 제공
특히 의열단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자금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던 장군은 부산경찰서 폭파의거,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등의 투쟁을 지원했다.

그는 1924년 중국 국공합작을 위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자 조선혁명가의 신분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했고, 북벌이 개시되자 6군 포병영 부영장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1926년 무창을 공격하던 국민혁명군 6군에는 한국인이 다수 있었다. 권준 장군과 이검운 포병영 영장, 안동만 부관 등이다. 그는 무창에서 결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어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의 훈련부 교관을 맡아 활동을 이어나갔다.

권준 장군
1933년 중국군 장교로 복귀한 장군은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도 한인 독립운동진영과의 연계와 참여를 시도해 일제의 감시대상이었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편찬위원, 내무부 차장, 경위대 대장 등을 역임하며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장군은 무창지역 교포선무단 단장과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 안전한 귀국에 전념했다. 그리고 1946년 12월 귀국했다. 귀국 후 국군창설에 참여해 육사 특8기로 졸업하고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이후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초대 육군 제50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59년 10월 6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장군의 황포군관학교에서의 훈련과 교관활동은 우리나라 국군 창설의 기초가 되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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