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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복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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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16 23:17:46 수정 : 2016-10-16 23: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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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1983~ )

철원에서는 올해 첫 얼음이 얼렸다는 소식이다 새벽 내내 끄물거리던 하늘은 멍든 입술을 다물었지만 내 속에서는 더운 김이 마술사 입안의 리본같이 새어나왔다 입김들이 는개같이 들어 자분자분 새벽을 접어 쓴 편지를 적실 때 내 안의 철책 위로도 가는 비 내렸다 물기로 축축한 글자들의 무게만큼 올겨울이 길듯 싶었다 늦가을이 독감을 앓고 물러난 자리마다 아직 아프지 못한 너의 이름 눈사람의 머리와 몸통처럼 아슬하게 나는 바깥에 닿아 있었고 몇 번인가 시간의 별명을 귓결로 들으며 나도 모르게 젊고 병들었다 그즈음 나는 풍문처럼 철원에 있었다 만년설처럼 엎드려서 입이 없었다 생면부지의 눈꽃이 자주 이는.


군복무 체험은 술좌석의 남자들에게 최고의 안주거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여 돋우는 목청은 지칠 줄을 모른다. 슬하를 벗어나 처음 겪는 조직생활과 임무수행의 애환이 각자에겐 유별났을 것이다. 통제와 절제와 자기동화의 기간, 집안의 망나니도 군대 갔다오더니 사람이 되었다는 말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김영남 시인
가수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 이후 군복무 체험이 이렇게 호소력 있게 전달되는 시를 필자는 처음 읽는다. 시 내용이야 ‘철원’ ‘첫 얼음’ ‘편지’ ‘철책’ ‘나도 모르게 젊고 병들었다’ 이 정도의 단어와 구절만으로도 파악이 충분하다. 그러나 정서적 감각적 인식과 호소력은 체험만으로 되는 게 아닐 게다. 시적 방법과 기교가 바탕이 되지 않고선 구현이 어렵다.

인용시에서 시인의 군복무체험이 독감처럼 병들었음을 본다. 이현호 시인은 이제 갓 33살이다. 다른 시에서 보여주는 이 젊은 시인의 역량은 무서울 정도다. 벌써 자기세계를 확실하게 구축하고 나아가는 시인 같아 보인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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