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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신해혁명의 별 김규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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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20 21:30:59 수정 : 2016-10-20 21: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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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독립투쟁의 선구자였던 범재 김규흥(1872∼1936) 선생은 한국인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의 신해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혁명 후 도독부총잠의 겸 육군소장을 역임할 정도로 중국혁명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선생은 1872년 6월 13일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하지만 경성에 머물며 공부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는 데 집중하던 선생은 귀향하지 못했다. 선생은 젊은 시절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에서 신문물을 접한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닭고 고향인 옥천에 창명학교를 세웠다.

김규흥 선생(작은 사진)이 주도해 발간한 ‘향강’ 잡지가 있던 홍콩 중환 황허우다이다오중 88번지 일대. 1930년대도 이곳은 도심 번화가였다.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던 선생은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대한자강회에서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선생은 더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1908년 중국 관동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름을 김복으로 바꾸는 등 신분을 철저히 숨기며 활동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독립지사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1911년 10월 한국인 최초로 신해혁명에 참여했다. 신해혁명을 일으킨 핵심인물 6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또한 선생은 ‘동제사’라는 비밀 단체에서 독립지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그는 1913년 12월 20일 동제사를 통해 홍콩에서 ‘향강’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향강은 최초의 한·중 합작 잡지였다. 1913년에는 프랑스 지역 내에 박달학원을 건립해 많은 독립지사들을 양성했다.

선생은 1921년 독립운동가 박용만과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해 무장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흥화실업은행은 금융기관을 표방하였을 뿐 사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베이징과 만주지역의 토지를 사고, 동지들을 모아 경작하게 하면서 각 군사단체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3년 자본(주식금) 확충 계획이 원활하지 않으면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1936년 8월 16일 선생은 톈진에서 작고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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