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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흔적조차 없는 송몽규 교토 한글 강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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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1-03 21:16:22 수정 : 2016-11-03 2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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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가 송몽규(1917~1945)는 윤동주 시인과의 관계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고종사촌형이다.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연유로 그는 윤동주 시인의 멘토였던 셈이다.

송몽규는 중국 지린성 룽징시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뒤 다라쯔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녔다. 이어 1932년 4월 룽징의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중 난징으로 건너가 광복군을 양성하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설치된 한인특별반 2기로 입학했다. 그는 독립투쟁을 벌이다 1936년 3월 산둥성 지난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강제 송환됐다. 1937년 룽징의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뒤, 이듬해 4월 윤동주 시인과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쿄토시 사쿄구 히가시이라이초 5~8번지 일대. 송몽규가 교토제국대학 재학시절 거주했던 곳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그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38년 조선어 수업이 폐지되자 동급생인 윤동주, 백인준, 강처중 등과 조선문학 동인잡지 출판을 위해 ‘민족적 작품합평회’를 개최하는 등 민족문화 유지에 노력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윤동주, 고희구 등과 함께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하고, 민족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 유학 중 ‘좌경도 조선학생 민족주의 집단 사건’의 주도자로 1943년 7월에 붙잡혀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순국했다.

그가 교토제국대학 재학 시절 거주했던 곳은 쿄토시 사쿄구 히가시이라이초 5번지. 1980년대까지도 이 지역에 조선인 무덤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어를 가르친 장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고 현대식 건물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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