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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찢는 자와 붙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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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1-11 01:28:59 수정 : 2016-11-11 01: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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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주화·주전파 격렬한 논쟁 벌여 / 국민이 분노의 촛불 들더라도 정치인은 국정 수습에 나서야 조정의 국론이 둘로 갈라졌다. 청나라와 화친을 하자는 호조판서 최명길의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주전파가 충돌했다.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으므로 우선 항복해서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게 최명길의 생각이었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이 즐비했지만 그의 외침을 새겨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부모의 나라인 명을 받들고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명분론이 득세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적군의 위협에 인조는 결국 최명길의 손을 들어준다. 항복 문서를 작성해야 했지만 나서는 이가 없었다.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김상헌은 그 글을 보고는 울면서 찢어버렸다. 최명길은 “나라에 대감과 같이 문서를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나처럼 다시 붙이는 신하도 있어야 한다”면서 국서를 다시 주워 모았다. 청의 대군이 남한산성을 에워싼 지 35일째 되는 1637년 겨울의 일이었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
김상헌은 최명길을 만고의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5년 뒤 청나라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최명길과 조우했다. 최명길은 명과 힘을 합쳐 청을 치려다 들통나는 바람에 쇠사슬에 묶여 끌려왔다. 최명길은 국왕 몰래 자기 혼자 벌인 일이라며 죽음을 자청했다. 그의 기개를 지켜본 김상헌은 비록 방법이 달랐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선 서로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야 100년 의심이 풀리는구나”라며 최명길과 마음을 주고받았다.

당시 청은 조선을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것은 최명길과 김상헌의 각기 다른 애국심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이 결사항전을 선택했더라면 청은 성안의 백성과 신하들을 죽이고 나라까지 접수했을지 모른다. 망국을 모면한 일은 주화파 최명길의 공임이 분명하다. 김상헌의 공 역시 작지 않다.

조선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김상헌 같은 선비와 백성들이 많았다. 청이 조선의 왕실을 없앨 경우 그들이 맞닥뜨릴 다음 상대는 낫과 죽창을 든 백성들이다. 명나라 침략을 앞둔 청으로선 이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대군을 계속 남겨둘 수 없는 처지였다. 청이 항복을 받는 차선책을 택한 이유다. 우리 민족이 수많은 외침에도 꿋꿋이 명맥을 이어온 것은 이런 두 개의 애국심이 작동한 덕분이다.

굳이 379년 전 병자호란을 다시 들먹이는 것은 그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다.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는 참으로 부끄럽고 충격적이다. 비설 실세 최순실에게 대한민국이 놀아난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분노가 국정 혼란까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촛불의 수가 아무리 늘어나도 우리 앞에 놓인 난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애국심이 필요하다. 하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권력자에게 분노의 촛불을 높이 드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국익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국정 혼란을 조속히 수습하는 역할이다. 전자의 애국은 지금 온 나라에 넘치는 반면 후자의 애국은 크게 부족하다.

야당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총리의 추천권을 국회에 넘긴 후에도 강경 투쟁을 고수한다. 대통령의 항복을 압박하며 영수회담조차 뿌리친다. 주말에는 대통령 하야 촛불시위에 동참한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경제·안보의 두 축이 흔들리는 국가 위기 앞에서 정치인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할 정치인들이 떼 지어 촛불을 드는 행태는 너무 무책임하다. 분노의 촛불은 광장을 가득 메운 국민만으로 충분하다.

국서를 찢는 자가 있다면 붙이는 자도 있어야 한다. 정치권까지 나서서 국서를 찢고자 한다면 혼란은 누가 수습하는가. 민심에 영합해 최명길의 실리에 고개를 돌린다면 대한민국의 혼돈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덕목은 김상헌의 명분이 아니다. 쉬운 길만 고집하면 국가가 어려워진다.

배연국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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