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32> "아들아, 남자도 울어도 된단다"

관련이슈 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 디지털기획

입력 : 2016-11-12 15:00:00 수정 : 2016-11-12 11:40:0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토끼야, 뽀뽀”

21개월 아들에게 보들보들한 토끼 인형은 소중한 친구다. 아이는 이부자리에서 팔다리로 인형을 휘감고 잠을 청하고, 물병으로 물을 먹이는 흉내를 내며 살뜰히 챙긴다. “같이, 같이”를 외치며 토끼와 함께 붕붕카를 타고 뽀뽀를 하기도 한다.

“남자 애한테 무슨 인형이야? 그건 여자애들이나 갖고 노는 거지.” 올 초 인형을 고르는 나를 보며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는 인형 좋아하면 안 돼? 더구나 아이인데 부드러운 느낌을 왜 안 좋아하겠어?”

아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의 사물에 “아∼아” 탄성을 내지르며 좋아했다. 우리집 고양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냥이들이 등짝을 허락할 때면 “꺄아” 흥분하며 끌어안고 비비댔다. 애니메이션 뽀로로를 보면서 아이가 가장 관심을 가진 캐릭터는 ‘패티’(여자 펭귄)였다. 나 역시 “엄마도 패티가 좋아∼”라며 패티 인형을 선물했다. 남편과 나는 “주인공인 뽀로로가 아닌 왜 여자 캐릭터를 좋아하냐?”고 말하지 않았다.

“여자라면 애교가 있어야지”, “나긋나긋해야지” 등이 성차별 발언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남자가 그깟 일로 울면 안 된다”, “남자가 왜 인형을 좋아하나” 등도 남성에 대한 성차별이다. 남성스러움을 규정하고 강요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독박육아’, ‘회사와 집에서 24시간 근무하는 워킹맘’ 등 육아부담을 진 여성의 고충을 이야기할 때마다 “남자들은 안 힘든 줄 아나”, “남자로 사는 것도 힘들다”는 반응이 뒤따르는 걸 보며 의아했다. 여성의 상황 개선이 남성의 처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남성의 책임감 논리가 확장돼 나타나는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부담해야 한다”, “신혼집은 남자가 장만해야 한다”, “남자라면 가계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등 남녀 관계에 수반되는 비용과 책임을 남성에게 떠넘기는 문화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지난 글에서 쓴 것처럼 남녀가 경제적 부담을 나눠지고 육아를 함께해야 한다. 남성이 장시간의 노동에서 벗어나려면 여성의 경제적 참여가 뒷받침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육아에 참여해 임신과 출산에 따른 여성의 경력 단절을 줄여야 한다. 하루아침에 이뤄질 일이 아니다. 집에서의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육아휴직에 나서는 남성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등의 변화가 거듭돼야 한다. 육아와 양육을 여성만의 몫으로 규정하는 한, 남성의 ‘경제적 독박’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선 신혼집, 데이트 비용 등 남성에게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는 세태가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여권 향상이 남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양쪽이 서로의 이익을 놓고 다퉈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가부장의 권위를 얻는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굴레를 짊어진다. 일터에 매이고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직장의 폭음 문화와 스트레스는 기대 수명을 줄게 한다. 남성의 조기 사망률은 여성보다 높다. 또 바깥 일에 치여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다보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아내와 자녀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가족의 생계를 혼자서 책임지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취업난, 비정규직, 명예퇴직 등 삶의 기반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는 주변에 널려 있다. 외벌이로 혼자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스트레스와 위험부담은 삶의 엄청난 무게다. 여성이 경력 단절을 겪지 않도록 돕는 건 남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난 아들이 남자다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이기에 더 의젓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아빠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삼촌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이다. 남편의 눈물도 거의 보지 못했다. 삶의 여러 고비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겨워할 때도 남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남자가 쪽팔리게 질질 짜면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아들과 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시도때도 없이 운다. 배고프거나, 아프거나, 화가 나거나, 요구사항이 있을 때면 목청껏 감정을 표현한다. 어린아이를 보면 눈물은 먹고 자고 쉬고 싶은 것과 같은 본능의 일부라는 걸 알 수 있다.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려는 것도 남녀를 가르지 않는 본능의 일부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남자들은 “남자가 말야”라는 주변의 질책과 강요로 감정표현을 억압당한다. 눈물은 약자의 것, 나약함의 징표라고 은연중에 세뇌 당한다. 그렇게 짊어지게 되는 남자다움의 무게가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운다고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속이 불편할 때 참고 있는 것과 토해서 뱉어내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다. 눈물의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삶에는 저도 모르게 쌓인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들의 베스트프렌드인 토끼 인형. 뽀뽀하고 업어주는 사이다.
난 훗날 장성한 아들이 사회에서 제몫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지만, 이런 소망 속에 ‘남자니까’라는 수식이 껴있지 않다. 아들이든 딸이든 이 아이의 부모로서 갖게 된 바람일 뿐이다. 딸에게 “여자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집안일 도와주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며 양성평등 개념을 가르치는 부모가 아들에게는 “남자다워야지”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선 부모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들 부모일수록 자신의 아이에게 은연중에 고정된 성역할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또 아버지 세대가 짊어졌던 남성의 삶의 무게를 덜기 위해선 남녀가 그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여성의 몫으로 여겼던 일을 남녀가 함께할 때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제공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