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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난파선은 난파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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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1-14 01:02:10 수정 : 2016-11-14 01: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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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령(1961~)
난파선은 난파선 속에 뒤집혀 있다 깃발이, 갑판이, 선미가 부서졌다
아니 실제론 뼈댄 안 부서졌다 해일에 부딪쳤고 태풍에 부딪쳤다
그것들은 부딪침으로 섞인다 난파선은 난파선 속으로 지금은 멀미 중이다
난파선이 나를 껴안으려 한다 난파선이 쏟아내고 있다 방향키도,
서랍도, 포크도, 변기도 꾸역꾸역 쏟아낸다 나온 것들이 서로 섞여 흐른다
너는 흐르지 못했다 아니 실제론 너는 쏟아내지 못했다 그 이름이 바다를 안는다

난파선은 난파선 속으로 해파리도 해초도 흔들림이 없다
다만 자갈벌엔 구름이 있다 햇살도 자잘하다 바라보면 바다는 여전히 투명하다
힘차다 뱃전에 앉은 바다새가 바다를 바라보고 그 옆 나는 구토를 하고
있다 두통이 자갈벌에 처박힌다 파도 소린 진행이다
여름 가을 겨울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하얀 소리가 부서진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떠올리게 하는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참 서글프다. 본노와 절망과 허탈한 심정을 넘어 창피스러워 어디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심정이랄까. 모두가 냉정하게 사태를 바라보며 진중하게 대응하는 태도다. 그만큼 충격이 의외였고 상처도 깊다는 의미일 게다.

김영남 시인
시 ‘난파선은 난파선 속으로’는 2015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바다에 좌초한 선박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난파선의 의미를 성찰한다. 순항의 깃발을 펄럭이며 떠난 배가 잘못된 항해로 태풍과 해일을 맞아 전복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온갖 오물로 바다가 더렵혀지게 되고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는 구토와 두통에 시달린다. 바다는 결국 난파선과 별거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난파선이 나를 껴안으려 하고’ 구조보다 ‘구토’부터 먼저 하게 되는 시 내용이 오늘의 우리 현실을 쏙 빼닮았다. 이 글을 쓴 작자는 예견이라도 한 걸까. 시는 역시 위대하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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