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며 촛불을 든 시민들이 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등 세종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주최 측은 이날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운집한 것으로 추산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전문가들은 이번 촛불집회가 역대 정부 규탄 집회와는 규모와 성격 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고 진단했다.
경북대 노진철 교수(사회학)는 “과거에는 특정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하더라도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면, 이번 집회는 국가적 신뢰가 상실돼버린 것에 대한 거센 분노의 표시였다”며 “시민들이 전국에서 광화문으로 결집한 것은 ‘거대권력은 견제할 수 없다’는 관념을 극복하기 위한 강력한 항의의 의미”라고 풀이했다.
경기대 박상철 교수(정치외교학)는 “규모 면에서 비슷할지는 몰라도 집회를 선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뚜렷한 집단이 없다는 점, 이념과 세대를 넘어선 각계각층이 불만과 저항에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명예혁명에 가깝다”며 “집회를 막으려는 세력이나 시스템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국민의 저항권 발동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난 시위여서 타협점을 찾기 어렵다는 점도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정치법학연구소 류홍채 선임연구원도 “국민이 단합해 평화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면서 정치적 입장이 미묘하게 엇갈렸던 야권도 하나로 뭉칠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세 전문가 모두 박 대통령이 이미 국민으로부터 통치력 상실 통고를 받은 셈이라며 해결책은 하야 또는 그에 준하는 조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노 교수는 “이번 집회를 통해 국민은 대통령에게 위임했던 권력을 철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대통령의 지시를 공무원이나 시민 중 어느 누가 따르겠는가”라고 지적했다.
반면 경희대 김민전 교수(정치외교학)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물러나는 계기가 됐던 인두세 시위만 해도 20만명이 모였는데, 이번 촛불집회의 100만명은 엄청난 숫자”라면서도 “박 대통령이 직을 내려놓고 검찰 수사를 받게 되는 상황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치권에서 수습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순실(60)씨의 국정농단 파문이 전면화되고 나서 지난달 29일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은 들판을 집어삼킬 기세다. 검찰과 청와대 간 압수수색 실랑이, 귀국한 최씨에 대한 시간 벌어주기,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온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팔짱 낀 여유로운 모습 등은 타오르는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날 광화문광장 촛불문화제 사회를 맡은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규모의 자발적 인파가 모여 평화적 집회를 통해 ‘이제 박 대통령에게 더 이상 기회를 줄 수 없다’는 범국민적 의사를 나타냈다”며 “박 대통령이 중립내각 수립, 조기선거 등 일정을 제시하고 적정한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시민이 촛불을 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집회를 주최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19일 전국 각지에서 자체 범국민대회를 진행하고 그래도 퇴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26일 다시 한번 서울 도심에서 집중집회를 갖겠다는 계획이다. 투쟁본부 관계자는 “민심은 이미 확인됐다”며 “즉각 퇴진하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길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날 일부 집회 참여자들이 과격한 모습을 보였지만 전문가들은 향후 집회 양상 역시 전반적으로 평화 기조 속에 흘러갈 것으로 내다봤다. 법원이 경찰의 행진 금지통고·조건통보에 대한 주최 측의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이고 경찰 역시 집회 참가자들을 먼저 자극하지 않는 등 국민의 의사 표출 기회 자체를 차단하지 않는 상황에서 집회가 폭력적 양상을 띨 경우 스스로 보폭을 제한하는 꼴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유태영·김범수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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