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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이강 선생 옥고 치른 샤먼 일본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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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1-17 21:23:38 수정 : 2016-11-17 22:5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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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젠성 구랑위 샤먼의 외국영사관 단지에 있는 일제영사관 건물. 이강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립기념관 제공
중국 푸젠성 구랑위 샤먼 외국영사관 단지 내에 고색창연한 옛 건물이 있다. 샤먼 문화재로 지정돼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으로 우리 애국지사들의 아픔이 서려있다. 일제 때 샤먼의 일본영사관으로 이용됐던 이곳에서 적지 않은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다.

구한말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이강(1878~1964) 선생은 여기서 옥고를 치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강 선생은 평남 용강군 봉산면 황산동에서 태어났다. 1902년 미주개발을 통해 이민 길에 올랐다.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영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904년 안창호 등과 함께 교민단체인 공립협회를 창설했다. 1907년 안창호의 제안으로 귀국한 뒤 양기탁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단인 신민회를 창립했다. 이강 선생은 몇 달 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현지에 신민회 지회를 설치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참석했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 특공대로 하얼빈에 따라가 대동공보사와 현장 연락을 담당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에는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베이징에 파견돼 활동했다. 1919년 9월에 강우규 의사가 일제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연루자로 지목돼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서울로 압송되어 약 50일간 구금됐다. 1919년 말에 석방되자 바로 상하이로 탈출,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했다. 일제의 세력이 양쯔강 일대에까지 뻗치게 되자 상하이를 떠나 남중국 방면으로 이주했다. 1927년 푸젠성 샤먼에 태백삼이라는 가게를 운영했다. 이곳은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장소 역할을 했다.

1928년 일제경찰에 납치돼 샤먼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평양으로 호송돼 징역 3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출옥하자 다시 중국 푸젠성으로 망명, 활동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광복이 되면서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선무단 단장이 되어 대만으로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국내에서는 흥사단 간부와 한중협회 임원을 거쳐 남산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4년 사망하여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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