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뉴욕행 기차를 탔더니, 백인 노신사가 말을 걸어왔다. 보통 백인은 굳이 말을 걸지 않는데, 그는 달변가였다. 한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를 비꼬았는데, 요약하면 이랬다. 트럼프는 원래 대통령에 뜻을 두지 않고, 단지 유명해지고 싶었다. 트럼프라는 브랜드만 널리 알리려고 했는데, 당선이 돼 본인도 놀랐다고 본다. 대통령이 됐으니 이제 편하게 말도 못하고, 여성에게 쉽게 접근도 못할 것이다. 노신사의 풍자에 웃음이 나왔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가 나의 국적을 물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노신사는 “국민을 위한다면 한국 대통령은 사임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 언론의 사설을 인용한 듯한 말을 면전의 백인에게 직접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조금이라도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면 (국정농단의) 서커스를 지금 끝내야 한다”고 청와대를 겨냥했던 말까지 떠오르자 참담함이 더해졌다. 노신사가 그나마 위로의 취지로 건넨 말에 희망을 찾았다. ‘역사는 장기적으로는 진보하고, 국민과 진리가 이긴다’는 이야기였다. 노신사가 사족까지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배출한) 공화당이 역할을 해줘야 하고, 한국에서는 여당이 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박종현 워싱턴특파원 |
한국의 새누리당은 어떤가. 지인들의 페이스북을 살펴보았다. 6주째 이어지는 주말 촛불집회에 나선 200만명의 일원이었던 지인은 “당분간 결혼식에도, 송년회에도 못 간다. 주말엔 나랏일(촛불집회 참여)을 해야 해서”라며 위트 속에 묵직한 속내를 표출했다. 정치적 수 싸움에만 적극적인 청와대와 정치권을 향한 돌직구는 차고도 넘친다. 잔머리를 굴리는 여우보다는 한칼을 가진 고슴도치의 자세를 요구하는 민심의 강도는 그만큼 단단하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공화당을 뿌리로 한 새누리당은 지금 우리 국민에게 어떤 존재일까. 정의보다는 권력자에게 추종하고 맹종하기에 바빴던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미국의 사상가 헨리 소로가 했던 말을 들려준다. “법이 아닌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야 한다. 나는 단 한 차례도 불의한 정부를 나의 정부로 인정한 적이 없다.” 국민은 영웅 같은 대통령, 훌륭한 정치인은 원하지도 않는다. 일반 국민 수준의 상식과 예의염치를 아는 이들이면 족하다.
박종현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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