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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제의책읽기,세상읽기] 2016 겨울 촛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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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05 21:33:58 수정 : 2016-12-05 21: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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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부정을 태우는 스스로의 정화
고통의 심연에서 거듭나는 생성 되길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전유물이었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사한다. 신들에 비해 너무나 나약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인간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선물 덕분에 인간은 급속도로 문명을 발전시켜, 지구상의 여타 종들과 다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제우스는 불의 사용을 금지했을까.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되면 신들에 버금가는 지위를 확보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 때문이 아니었을까. 반면 프로메테우스의 입장에서 불은 지식의 보급을 뜻하는 것이겠다.

굳이 ‘불은 지식’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메시지를 떠올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떠올리고 상상하게 한다. 불은 스스로를 태워 주위의 어둠을 밝힌다. 불의 정수리인 불꽃은 어둠과 밝음, 그 명암의 심연을 성찰하게 한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에서 재생, 어둠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몽상거리를 보게 된다. 그 심연에서 몽상의 깊이와 울림을 전해준 ‘촛불의 미학’은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며,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거론되는 과학 철학자이자 평론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마지막 저작이다.

여러 불꽃 중에서도 특히 촛불은 인간에게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꿈꾸고, 꿈꾸면서 생각하기 위해 촛불을 애용한다. 촛불은 세상의 첫 빛과 같은 형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을 그러니까 근원을 보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몽상하게 한다. 바슐라르는 촛불의 불꽃에서 “혼의 정밀성을 재는 예민한 압력계, 섬세한 조용함, 생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는 조용함” 등의 이미지를 날카롭게 견인한다. 편안한 몽상의 흐름, 그 부드럽고 조용한 지속의 연속성 속에서 그는 부정성의 정화를 명상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물질이 빛을 낸다는 것은 스스로 적극적인 정화를 수행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소멸시키면서 순수한 빛을 내는 것은 불순물 그 자체이기에 악은 선의 양식이 된다”면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부정을 태울 것”임을 그는 강조한다.

붉은빛과 흰빛으로 일렁이는 촛불의 조용한 역동성이 주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슐라르의 몽상을 따라가면 아래쪽의 푸른빛과 연결되는 흰빛은 사회와 권력의 부정성을 태우려는 의지와 닮아 있다. 심지와 연결된 붉은빛은 더러운 불순물로 파악된다. 촛불의 일렁임이란 붉은빛의 하강과 흰빛의 상승 사이의 내밀하면서도 역동적인 운동이다.

이에 바슐라르는 “촛불의 불꽃은 가치와 반가치가 서로 싸우는 결투장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역동성은 새로운 생성을 향해 긴장하는 특별한 세계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며, 시간은 출렁거린다. 빛이 떨면 모든 것이 떤다. 불의 생성은 모든 생성 가운데 가장 극적이며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닌가”라면서 그는 이런 불의 생성을 상상한다면 세계의 걸음은 빨라질 것이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예단한다.

그러나 생성은 고통 속에서 길어진다. 바슐라르는 “불꽃은 괴로워하는 존재”이고, “불꽃의 고통은 곧 세계 고통의 표지”임을 강조한다. 2016년 겨울의 촛불 불꽃들도 고통의 심연에서 금지의 늪을 건너 새로운 생성을 몽상하며 타오른다. 세상과 나 자신이 공히 새롭게 거듭나는 생성을 꿈꾸는 것이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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