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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12월의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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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12 01:15:19 수정 : 2016-12-12 0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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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규(82)씨의 낡은 달력은 올해 본 전시회의 전시품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는 달력에 붙여 둔 조그만 쪽지에 자녀들이 전화를 걸어온 날은 얇은 글씨로, 다녀간 날은 굵은 글씨로 기록해 두었다. ‘효도일기’라고 불러도 되겠다. 국립민속박물관 ‘노인’전의 출품작 중 하나였는데, 그것을 보며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59년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일기는 자신의 일상을 적는 데서 출발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국가의 중요행사까지 기록했다. 박물관은 매일 일기를 쓰기 위해 술, 담배까지 끊었다는 임씨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기록하는 노인”이라고 소개했다.

일기에 관해서라면 유만주는 임씨의 직계 선배쯤 되겠다. 그는 ‘흠영’을 남겼다. 21살이던 1775년부터 죽기 1년 전인 1787년까지 1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적은 일기다. 34년의 짧은 생을 끝내며 흠영을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한 아버지 유한준이 정리해 후대에 남겼다. 

강구열 문화부 기자
“나는 글을 잘 못하지만 나의 글은 흠영에 있고,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하지만 나의 시는 흠영에 있으며…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

흠영을 곧 자신의 존재로 생각했으니 흠영이 존재하는 한 유만주는 살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처럼 일기를 써야 한다고 하면 지나치다. 내 눈에 그들의 일기는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기가 일기의 긍정적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젊은 시절 임씨는 일기를 쓰기 위해 술, 담배를 끊는 등 꾸준히 자기 관리를 했고, 여든이 넘은 지금도 일기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유만주는 세상에 있었던 날이 길지 않았으나 흠영이 있어 200년이 지난 지금껏 자신의 존재를 전한다.

일기의 효용이란 게 이 정도라면 쓰는 게 지긋지긋 하다고 손을 저을 일만도 아니다. 게다가 12월이지 않은가. 누구라도 지난 1년을 돌아보고 내년을 구상해 보려 할 때다. 일기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아지는 시간이 이즈음이다. 아직 챙겨보지는 않았지만 문방구나 서점에는 이미 다이어리가 매장에 깔려 있을 것이고, 적잖은 사람들이 그중에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일기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고, 그날그날의 일정이나 간단한 메모를 적어둔 수첩이 있다. 지난 1월에 나는 이 수첩을 사며 열심히 쓰겠노라는 다짐을 했더랬다. 당시의 결심만큼 성실하지는 못했지만, 올해를 되돌아보는 단서가 되어 나름 만족하고 있다. 1월 28일, 이제는 형님, 아우할 정도로 친해진 출입처 사람과 저녁을 먹었고, 2월 28일에는 부산에 사는 조카가 놀러와 하루를 같이 보냈다. 이날 서울에서 산 지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야간의 광장시장을 경험했다. 올해 본 책 중에 가장 재밌었던 ‘신 로맨스의 탄생’은 8월 29일에 읽기를 마쳤고, 기사를 쓰기 위해 사흘 후 대표 저자와 통화를 했다.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까맣게 사라졌을 시간이다. 수첩이 있어 나의 2016년은 앞으로도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강구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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