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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6개월간 취재했습니다. 소송에도 대비했습니다. 우리팀 중 한명은 구속을 각오했고, 저는 언론계를 떠날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검찰의 수사결과를 기다리면서 그래도 정의감이 살아있기를 기대했다. 검찰은 “광범위한 조사 등을 집중적으로 진행한 결과 문건의 내용이 허위임이 밝혀졌음”이라고 발표했다.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풍설들이 정보로 포장되어 무분별하게 유포되고 공직자에 의해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가공되어 국정운영 최고기관의 동향보고 문건으로 탈바꿈하였으며∼.”
권력의 칼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조응천 전 청와대 비서관 불구속기소, 박관천 전 청와대 행정관 구속기소, 한○○ 서울경찰청 경위 불구속 기소.’ 박동렬 전 대전국세청장은 정보를 제공한 인물로 지목돼 괘씸죄에 걸렸다. 최모 경위는 자살에 내몰렸다. 참다 못한 대통령 동생 박지만씨는 검찰로부터 위증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냈다.
세계일보가 비선실세의 국정개입 의혹을 보도한 직후 검찰이 세계일보 본사를 압수수색할 것으로 알려진 2014년 12월 5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세계일보 사옥 앞에 취재진이 몰려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25년간 잠재의식 밑에 깔려 있던 피해망상이 되살아났다. 세계일보가 1991년 2월 ‘수서택지 분양특혜, 당·정·청 유착의혹’을 보도했을 때였다. 이 기사로 인해 6공 최대의 비리가 드러났다. ‘청와대·평민당 측면지원, 한보 매입후엔 국회로비’ 등 정경유착 실상을 고발했다. 한보 정태수 회장과 장병조 청와대 비서관이 구속되는 등 태풍이 덮쳤다. 세계일보 편집국에도 회오리가 몰아쳤다. 선배 기자들은 사표를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때 세계일보가 죽었다. 그렇게 언론을 죽인 권력과 기업인은 동고동락했다. 6년 뒤 정태수는 IMF환란의 주범이 됐다. 한보비리사건이 터져 정치인 30여명 뇌물리스트가 떠올랐다. 나라가 결딴났다. 그 시작과 끝을 지켜봤던 나는 두려워했다. 언론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가 빚어내는 참상을 말이다.
이번에는 죽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날아드는 압박을 모두 감당할 순 없었다. 압박의 칼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2년 만에 칼주인이 노출됐다. 김영한 수석의 메모에서다. “세계일보 공격방안. 압수수색 장소 세계일보사. 통화내역(전후 3개월). 세무조사 중(?).”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2014년 11월 28일부터 기록됐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수석, 민정비서관, 공직기강비서관, 홍보수석 등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칼끝을 어디로, 어떻게 날릴지 논의했을 것이다.
한용걸 논설위원 |
대통령은 취임 때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한다. 헌법 21조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선서를 팽개치고 세계일보에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헌법을 위반해 권력을 남용한 의혹은 밝혀져야 한다. 언론이라는 지진감지계를 꺼버리면 대재앙이 몰려오는 것도 모르고, 국민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 경보장치를 강제로 꺼버리려고 하는 권력이 나는 무섭다.
한용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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