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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고도성장기 산업역군 이면 소시민 이주사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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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23 20:34:53 수정 : 2016-12-23 20: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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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 21명 인터뷰 엮은 재독 작가 박경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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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 하면 1960·70년대 독일로 나간 산업역군으로 보죠. 그 이면에 흐르는 민초의 삶은 드러나지 않았어요. 이들은 역사 속에서 아무 존재감 없이 사라질 이들이에요. 이들의 알려지지 않은 삶, 민초로서의 삶을 끌어내고 싶었어요.”

재독 작가 박경란(44)씨가 파독 간호사 21명의 인생사를 책으로 엮었다. 그가 쓴 ‘나는 파독 간호사입니다’에는 1960·70년대 독일로 건너가 정착한 간호사들의 지나온 50∼60년이 담겨 있다. 흔히 예상하는 눈물 겨운 고생담이나 화려한 성공담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듯, 생계에 쫓기거나 부푼 꿈을 안고 독일로 간 청춘들이 살고 사랑하고 후회하고 나이 들어간 시간이 담담히 적혀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박 작가는 “건조한 기록·정책 소개보다 우리 누이·언니·이모들의 삶이 어땠는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며 “‘파독’이라는 공통분모로 출발한 사람들의 이주사, 소시민의 삶은 어땠을까 궁금했다”고 했다. 

“유명한 사람, 강한 자들만 역사에 남아요. 전 여기에 반기를 들고 싶었어요. 파독 간호사는 독일 공동묘지에 잠들면 소리 없이 사라질 분들이죠. 이들이 왜 독일에 왔고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는지 그냥 묻히는 게 안타까웠어요. 평범한 분들을 담론화해보고 싶었어요.”

백과사전이나 교과서에 서술된 파독 간호사는 ‘1965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에 파견된 1만371명의 간호인력’이다. 이들은 ‘매년 국내로 1000만마르크 이상의 외화를 송금하며 경제 개발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박 작가가 들여다본 삶의 결은 훨씬 다채로웠다. 이묵순씨는 ‘그저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 무조건 지원서를 냈고, 독일에 온 지 2년째에 자동차를 구입했다. ‘좀더 넓은 데서 살아보고 싶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꼭 음악대학에 가고 싶어서’,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비자 받기가 워낙 어려워 차선책으로’ 등등 독일행을 택한 이유만도 제각각이었다. 물론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떠나온 이들도 많았다. 박 작가는 “이분들은 ‘우리 집이 가난해서, 내 자아 발견을 위해 떠났는데 시간이 지나니 나를 애국자라고 하더라’라고 겸손하게 말한다”고 전했다.

독일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배치될 병원 번호표를 받으며 ‘노예로 끌려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병원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독일에 덜렁 남겨진 고아처럼 외로움이 몰려왔다’고 한다. 음식·언어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코끼리처럼 육중한 독일인의 몸을 들어올리고 간호하는 일’도 무리였다. 많은 간호사들이 이 때문에 지금도 허리 디스크에 시달린다. ‘외로움과 두려움이 스멀거리면’ 나이 많은 한인 간호사의 방에 모였다. ‘밤새 울며 껴안고 한국 노래를 부르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독일에서 9년째 거주하고 있는 박경란 작가는 “파독 간호사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독일에서 간호조무사 비슷한 교육을 받아봤는데 정말 힘들더라”며 “나이 든 독일 분들은 지금도 파독 간호사를 기억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강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허정호 기자
박 작가는 “파독 간호사 중 3분의 1은 독일에 남고 3분의 1은 미국·캐나다 등 타국으로, 3분의 1은 조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독일에 남은 이들은 가정을 꾸렸다. 이 중에는 서독 스파이인 남편 때문에 24∼29살 청춘을 동독 교도소에서 보낸 기구한 사연도 있고, 파독 간호사 최초로 의사가 되거나 성악가로 인정 받은 성공 사례도 있다. 박 작가는 “파독 간호사·광부는 독일 동포사회의 탄탄한 뿌리를 내린 분들”이라며 “교육을 잘 시킨 결과 한인 2세들이 성실하게 독일 주류 사회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박 작가는 2007년 남편의 이직으로 독일로 이주했다. 파독 간호사를 만난 건 2009년부터였다. 우연히 인터넷 게시판에서 봉사활동 교육을 하는 사람의 글을 읽은 뒤 평소 관심 있던 노인 돌보미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파독 간호사와 연이 닿았다. 한인행사에서 인사를 나누거나 알음알음 소개 받으며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매년 만나온 이들이 “일일이 세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500명이 덜 되거나 더 되는 정도”다. 그는 “사람은 하나의 도서관이라 하는데, 저는 이분들을 만나면서 도서관을 통째로 가져오는 느낌”이라며 “앞으로도 이들의 삶을 계속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밝혔다. 그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간호사는 대단한 도전 끝에 크게 성공한 이들이 아니었다.

“가장 와닿은 이야기는 아버지와 뒤늦게 화해한 분의 인생이에요. 이분은 아버지와 지내는 게 힘들어서 독일로 탈출했어요. 아버지가 서울 갈 차비를 주며 방바닥에 촥 뿌릴 정도였어요. 이분이 한국에 가려 하면 아버지가 ‘비행기 표값이 있으면 차라리 나한테 보내라’고 할 정도로 매몰찼어요. 그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야 이분에게 ‘독일에서 힘들었지, 나랑 같이 살자’라고 말씀하시더래요. 그렇게 아버지와 헤어진 지 3일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이 얘기를 들으며 지금 삶이 척박해도 우리를 구원할 건 사랑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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