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A는 내 친구다. 입사 3년차, 잔뜩 벼르다가 날린 회심의 한방이 ‘풍계리 핵실험장’이었다는 설명에 나와 다른 친구들은 포복절도했다. 자연스럽게 비슷한 경험을 늘어놓았고, 이날 송년회의 주제는 ‘직장내 성희롱’으로 흘러갔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나를 비롯해 공기업, 홍보대행사, 병원 등 직종은 다르지만 고충은 다들 비슷했다. ‘여자 분들 앞에서 이런 얘기해도 되려나∼’로 시작하는 질펀한 음담패설, 은근슬쩍 이어지는 스킨십은 기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일상대화로 둔갑한 ‘외모’에 관한 이야기다. ‘못생겼다’, ‘뚱뚱하다’ 등 부정적 뉘앙스뿐 아니라 ‘미인이다’, ‘아름답다’ 등 칭찬(?)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 그 모든 말들이 문제다. 일의 특성이나 대화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상대를 ‘여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둬두는 행위, 일종의 ‘배제’다. 칭찬이 아닌 폭력이다.
김민순 문화부 기자 |
누군가는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지 말라고 한다. 적당히 ‘능청스럽고’, ‘여유롭게’ 넘어가는 것도 여성이 갖춰야 할 사회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래서 여자와는 일을 못한다’며 상대에게 죄책감을 떠넘기기도 한다. 상대방이 웃고 넘어간다 해도, 그 자리가 즐거웠던 것은 당신뿐일 수 있다. 무난한 직장생활을 위해 여성 동료들은 ‘센스있는’ 모범답안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눙치고 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다. 젠더감수성은 여성 혹은 특별한 남성만의 것이 아니다. 칭찬에 내재된 권력을 의식하는 것, 내 옆의 동료를, 후배를, 선배를 여성으로 한정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한다. 만약 이 글을 읽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얼마 전 송년회에서 던진 ‘실언’을 떠올렸다면 새해부터는 달라지자. 그리고 더 이상 “예쁘다고 하지 마세요.”
김민순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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