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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저무는 국운 되살리려 수천의 기도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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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29 10:00:00 수정 : 2016-12-29 16: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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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 성주사지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한 곳으로 승려들 2000명 넘던 대형 사찰
옛 영화의 흔적 사라지고… 홀로 선 석탑만 천년의 세월 지켜
충남 보령 성주사는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에 누구든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 사상을 당나라에서 배운 낭혜화상이 세운 절이다. 지금은 5층 석탑과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등만 남아 있어 옛 영화를 찾기 힘들지만 당시엔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그저 그런 모습일 뿐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유적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건물 하나 남은 게 없다. 언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공허함이 오히려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천 년을 더 거슬러 올라 당시의 모습을 꿈꾸며 드라마틱한 풍광을 그리게 한다. 거기에 새로운 시대와 사상에 대한 갈망을 담은 사연이 있는 곳이라면 빈터이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은 자신만의 역사 이야기 한 편을 품을 수 있다.
대로변 옆 잔디밭 위에 세워진 큰 탑 하나가 보인다. 충남 부여를 가봤다면 본 적이 있는 모습의 탑이다. 백제 유적을 대표하는 정림사지 5층 석탑과 형태가 비슷한 5층 석탑이다.

유적보다 주위의 허허로움에 익숙해지는 충남 보령 성주사지는 눈에 띄는 5층 석탑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비슷하지만 이 탑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탑, 다보탑 등 신라의 탑이 대체로 3층인데 그보다 규모가 큰 5층으로 석탑이 조성된 것은 백제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는 왕실이 부패하면서 왕권의 중심인 서라벌(경주)의 힘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호족 세력의 힘이 커진 신라 말이라는 점과 관련 있다.

신라 때는 왕실 후원을 받은 교종이 번성했다. 교종은 경전과 교리를 받들었는데, 일정한 신분을 갖추지 못하면 승려가 될 수조차 없었다. 호족들은 이 같은 계급사회에 불만을 품게 됐고, 새로운 사상을 갈망했다. 이때 신라에 퍼진 것이 선종이다. 누구든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사상은 당시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성주사는 당시 당나라에서 선종의 가르침을 받은 승려들이 세운 ‘구산선문’ 중 한 곳이다. 아홉 곳의 큰 산 아래 문을 연 선종 사찰인 구산선문 중 성주사는 낭혜화상이 세운 절이다.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신라 전통 방식이 아닌 세력이 커진 지방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성주사 등 구산선문은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한 셈이다.
성주사지의 3층 석탑엔 문고리가 달린 대문 장식이 돼 있는데, 탑이 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조각된 것이다.

규모도 한때 2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는 전국 최고의 절로 손꼽힐 정도였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건물 하나 남아있지 않다. 5층 석탑 뒤편으로 절터의 흔적이 복원돼 있다.

절터 뒤편으로는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신라 말기에 세워진 탑이지만, 성주사 탑이 아니라 후대에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들엔 문고리가 달린 대문 장식이 돼 있는데, 사리를 모신 탑임을 드러내기 위해 조각된 것이다. 
성주사지의 석불 입상은 얼굴 형태를 알기 힘들 정도로 훼손돼 있다.
3층 석탑 오른편으로는 얼굴 형태를 알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석불 입상이 하나 서있다. 려말선초 때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입상은 시멘트로 얼굴이 발라져 있다.

3층 석탑 왼편으로는 비각 안에 비석이 하나 놓여 있다. 단순한 비석으로 보고 넘길 수 있는데, 바로 신라 최고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성주사를 세운 낭혜화상을 위해 쓴 비문으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8호)’다.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진골이었던 낭혜화상의 고매함을 칭송한 글이다. ‘저 사람이 (물을) 마신다고 해서 나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며, 저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나의 굶주림을 구해주지 못한다. 어찌하여 자기가 직접 마시며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단 말인가’라는 낭혜화상의 가르침이 비문에 감겨 있다. 
신라 최고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이 성주사를 세운 낭혜화상을 위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1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대로 그 비문이 잘 보존돼 있는데, 이는 보령에서 나오는 오석인 남포석으로 비석을 세웠기에 가능했다.

탑과 비석 외에 이렇 다할 건물 하나 없는 성주사지이지만 당시 시대상과 남은 유적에 담긴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 빈터에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보령은 한 때 70여개 광구에서 5000여명의 광부가 연간 150만t의 석탄을 생산했다. 198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광산은 폐광됐고, 지금은 석탄박물관에서 당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성주사지를 둘러본 후 차로 5분여 떨어진 곳에는 석탄박물관이 있다. 충남 인근 지역에 없던 탄광이 보령엔 있었다. 강원도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으로 ‘검은 금’을 캐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때 70여개 광구에서 5000여명의 광부가 연간 150만t의 석탄을 생산했다.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10% 정도다. 하지만 198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광산은 폐광됐고, 지금은 석탄박물관에서 당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석탄 박물관에선 엘리베이터를 타봐야 한다. 깜빡거리는 불빛과 음향 등을 통해 지하 400m까지 내려가는 기분을 체감할 수 있도록 실감나게 재현해놨다. 실제는 2층에서 지하 1층으로 두 층을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다.
충남 보령 충청수영성의 성곽을 따라 걸으면 오천항과 천수만 등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서해로 펼쳐진 시원한 풍경이 인상적이다.

보령은 대천해변과 무창포해변 등이 유명한데, 오천항 충청수영성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광도 놓치면 아쉽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오천항과 천수만 등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서해로 펼쳐진 시원한 풍경도 인상적이다.

보령=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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