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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문학기행] ‘무언가를 세는 것’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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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29 21:24:01 수정 : 2016-12-29 21: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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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소멸의 시간 헤아림같아 슬퍼
세상 셈법 잊은 덕분에 꿋꿋하게 살아
연말이 올 때마다 ‘또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 두렵다. 아무리 거듭되어도 잘 익숙해지지 않는 불안이다. 스스로를 ‘성과 주체’로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는 ‘올해는 과연 내가 무엇을 해냈나’ 하는 반성 때문에 연말이 더욱 괴로워진다. 스스로를 평가할 때조차도 업적을 계산하는 현대인의 뒷모습은 어쩐지 더욱 쓸쓸하다. 계산을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일까. 어린 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소풍 날짜를 손꼽아 기다릴 때는 신났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계산한다는 것은 대부분 머리 아픈 일이 되어버렸다. 통장 잔고나 연말정산을 떠올릴 때도, 하나 둘 늘어가는 흰머리를 셀 때도, 무언가를 센다는 것은 다가올 소멸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 같아 슬퍼진다.

그런 서글픔을 가슴에 안은 채 김준태의 ‘감꽃’을 읽는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감꽃’을 읽으며, 계산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계산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빛깔이 달라짐을 느낀다. 늘어나는 주름살을 세어보는 것은 슬프지만, 아기가 태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엄마가 예정일을 세어보는 것,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이 기념일을 세어보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닌가. 올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셈해보는 것은 슬프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을 하나 둘 가만히 헤아려보는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지.


정여울 작가
정희성 시인의 ‘태백산행’을 읽으며, 나이를 세는 것은 꼭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나이 셈법이란 이토록 상대적이다. 눈이 내리자 불현듯 여행을 떠나고 싶어 불쑥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서려는데, 아내는 “지가 열일곱 열아홉이야” 하고 ‘나이 좀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칠십고개 넘어서는 노인들이 보기에는 쉰일곱 사내가 더할 나위 없이 팔팔해 보인다. 노인들은 쉰일곱 사내에게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라고 말을 걸고, 그야말로 “조오흘 때다”라고 외치며 부러워하지 않는가. 똑같은 쉰일곱 살이 아내가 볼 땐 너무 많아 보이고, 처음 만난 노인들의 눈에는 무척이나 젊어 보인다.

‘무언가를 세는 것’을 생각해보니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산하기’의 장면 중 하나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떠오른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며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떠올리다가, 문득 어머니가 떠오르자 별 헤는 몸짓이 저절로 멈춰진다. 그토록 그리운 것, 그토록 아린 것을 생각해내는 것은 모든 계산을 잊게 하지 않는가. 별을 세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세는 것을 나도 모르게 불현듯 잊어버리는 이런 순간이 참으로 좋다. 계산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세상의 셈법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런 순간 덕분에 우리의 삶은 아직 꿋꿋이, 견딜만 하기에.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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