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설은 큰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최계립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안착해 독립전쟁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그러나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은 1월31일에 일본헌병대에 체포돼 다음해인 1921년 8월에 사형당했다.
당시 소총 한 자루가 3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5만원은 5000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거금으로 현재 가치로는 75억원에 달한다.
중국 용정시 지신향에서 백금으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 세워진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와 최봉설 의사(작은 사진). 1920년대 15만원은 지금의 75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
그는 1919년 3·1운동 이전 이동휘가 파리에 대표를 파견할 때 모금위원으로 활약했다. ‘15만원 탈취사건’ 이후 러시아 연해 지방 칼리닌그라드 이만(Iman)에 있는 대한의용군사회의 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소대장, 중대장으로서 백군(러시아 반볼셰비키군)과의 전투에서 할약했고, 특히 1922년 2월에 시작된 볼로차예프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1923년 2월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적기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다. 1925년에 적기단이 해체되자 러시아로 돌아가 연해주 추풍(수이푼) 지역에 있는 그라데고보에서 안드레이예브카 콜호스 회장으로 일했다.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1937년 중앙아시아 우즈베크공화국의 호레즌 갈대밭으로 이주당했다. 그 후 그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콜호스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우즈베크의 침켄트시에서 1973년에 숨졌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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