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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골프는 재능보다 노력… 무수한 타이틀 따냈지만 한 게임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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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30 19:54:54 수정 : 2016-12-30 20: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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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역’ 최상호 프로골퍼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 투어에서 40년을 뛴 최상호(61) 프로는 남자 골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불멸의 기록으로 평가받는 국내 정규 투어 최다승(43승) 기록을 보유한 그는 시니어투어(만 50세 이상)를 거쳐 요즘도 그랜드 투어(60세 이상)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최다승 부문 2위는 박남신(57)의 21승이니 그의 기록은 좀처럼 깨어지기 힘들다. 국내에서 공식 대회 우승 트로피만 합쳐도 그의 나이보다 많은 64개다. 그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대기록이다. 그래서 ‘영원한 현역’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최 프로는 골프계에서 ‘특급 매너남’으로 불린다.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에티켓과 룰을 강조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운동인 골프를 40년 넘게 쳐왔던 덕에 ‘매너’가 몸에 밴 덕분일 게다. 그는 손자 세 명을 둔 할아버지로 보이지 않았다. 다음달이면 손자가 또 생긴다. 

‘영원한 현역’이라 불리는 코리안 투어 40년차의 최상호 프로가 최근 자신의 텃밭인 경기도 성남의 남서울CC에서 퍼터를 이용해 퍼팅 라인을 신중하게 살피고 있다.
성남=하상윤 기자
깔끔한 옷차림에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그의 실력은 아들보다 더 어린 후배들과 당당히 맞설 정도다. 넘쳐나는 골프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는 예나 다르지 않다. 그는 대회가 없어도 대회 때와 늘 똑같은 오전 6시에 일어나 연습 볼을 치고 라운드를 하면서 평생 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남에게는 너그럽고 자기 관리에는 엄격하다. 골프가 직업이니까 클럽을 놓을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 모아둔 트로피는 방 하나를 채우고도 남는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골프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영광의 트로피는 물려줄 생각이다.

비시즌인 요즘에도 일주일에 서너 차례 라운딩한다는 최 프로를 최근 경기도 성남의 남서울CC에서 만났다. 운동선수로서 생명인 경기 감각을 지키기 위해서다. 내년 1월 설날을 앞두고서는 20일간의 일정으로 태국으로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다. 태국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 위주의 체력 강화훈련에 집중한다. 체력을 비축해 놓아야먄 돌아오는 시즌을 소화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경기 고양군 원당면에서 농사 짓던 집안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16살의 소년이 골프라는 낯선 스포츠를 처음 접한 것은 1970년 무렵이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그의 집 근처에 어느 날 골프장(뉴코리아CC)이 개장했다. “운동에 소질이 있었지만 처음 보는 운동이었다. 너무 재미있어 보여 용돈도 벌 요량으로 골프연습장에서 입장 쿠폰도 받고 채도 닦아주며 아르바이트로 일했죠. 그렇지만 이게 천직이 될 줄은 몰랐어요.”

하얀 공이 쭉쭉 뻗으며 멀리 날아가는 모습에 반한 소년은 뉴코리아CC 총지배인으로 KPGA 프로출신 3번 배용산씨한테는 감히 레슨을 받지 못하고 10살가량 위인 연습장의 손흥수, 손창열 프로들로부터 골프를 배웠다. 매트가 아닌 땅바닥에서 공을 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연습효과는 만점이었다. 공을 정확하게 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맨땅에서 치는 탓에 피칭이나 샌드웨지는 1년이면 닳아서 없어질 정도였다. 눈을 떠서 밥먹는 시간 외에는 골프공과 씨름하며 하루 1500개 정도의 볼을 쳤다.

열심히 골프를 배웠지만 최 프로는 정작 1년에 두 차례 실시된 프로 테스트에는 낙방을 거듭하다 7전 8기 끝에 합격했다. 그는 여러 차례 떨어지다 보니 실력을 더욱 쌓을 수 있었고, 훗날 방심하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1977년 9월 KPGA 회원이 된 그는 프로데뷔 1년 만에 여주오픈에서 첫 우승을 신고한다. KPGA투어 43승을 모두 기억하지만 여주오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기라성 같은 한장상(75) 선배한테 3타 뒤진 3위로 최종 라운드를 출발했는데 역전우승을 했어요. 당시 보통 대회 우승 상금은 60만원이었지만 여주오픈에선 우승상금이 무려 300만원이었어요.” 

최상호(오른쪽)가 1989년 한양CC에서 열린 메이저 대회인 제32회 한국프로골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와 우승 상금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의외로 빨리 첫 우승을 올린 최 프로는 큰 자신감이 생겨 났다. 1980∼1996년 중 무관에 그쳤던 시즌은 1988년 한 해뿐이다. 매년 3∼4승을 꾸준히 쌓았다. 그러나 88년에는 우승이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 프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전지훈련을 갔다가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선수들의 경기를 답사했는데 그들의 실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450야드나 되는 파4홀에서 저 같은 경우는 우드를 쳐도 온그린이 될까 말까 할 판인데 그들은 짧은 아이언을 잡더라고요. 실력상으로 차원이 달랐지요.”

PGA투어에 진출하려면 거리를 우선 내야겠다는 생각에 최 프로는 귀국한 뒤 그립과 스탠스를 바꿔봤고, 스윙아크를 크게 하려다 보니 자연히 몸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거리를 내겠다는 욕심으로 스윙에 난조가 온 탓에 그해는 무승에 그쳤다. “또 만 50세가 넘어야 출전할 수 있는 PGA 챔피언스투어에 데뷔하려 했으나 그들이 체력적으로 10년 이상 앞선 느낌이었어요.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가 20∼30야드 더 멀리 가니 우승할 자신이 없다고 판단했죠.” 국내 간판 선수로 군림했지만 PGA 무대에 도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고 털어놨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PGA투어행을 포기하고 국내에 안주하기로 마음먹은 최 프로는 89년에 또 코리안 투어 시즌 최다승인 4승을 거두며 우승행진을 시작했다. 시즌 4승을 무려 3번이나 기록했다. 여자골프 투어와는 달리 생계형으로 벽이 높은 남자골프 투어에서는 시즌 2승을 올리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그는 대회에 출전하면 늘 우승후보로 손꼽혔다. 한국의 대표 골퍼로 자리매김한 최 프로는 만 50세가 넘은 2005년 5월 매경오픈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며 최고령 우승자(만 50세 4개월)라는 기록을 하나 더 보탰다. 이 기록도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키 170㎝에 70㎏ 정도의 체중을 평생 유지해 오고 있는 최 프로는 20대 때 퍼시먼(감나무) 드라이버로 230야드를 쳤는데 지금은 티타늄 드라이버로 평균 260야드를 보낸다. 그는 장타자가 아니었지만 승부근성으로 무장한 쇼트게임의 귀재로 통했다. 최프로는 우승의 비결에 대해 “연습 말고는 달리 왕도가 없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요즘은 체력적으로 달려서 그렇지 못하지만 30년가량 매일 1000개 이상의 공을 치고 1주일에 6번 라운딩을 했다. 타고난 천재이기보다는 노력하는 연습벌레였던 셈이다.

70년대 후반 한양CC의 골프 유망주로 선발된 최 프로는 골프장에서 살았다.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천연 잔디 위에서 퍼팅 연습과 어프로치 연습을 할 수 있는 등 남들보다 골프환경이 좋았다. 그러다가 1990년 대한골프협회(KGA) 회장인 허광수(71) 남서울CC 회장의 도움으로 남서울CC에서 24년간 헤드프로로 활약하다 2014년 정년 퇴임했다. 지금은 경기 고문을 맡고 있다. “헤드프로는 골프장으로부터 매달 급여를 받는 자리입니다. 환갑을 앞뒀는데 그 자리를 지키기에는 너무 미안했어요. 프로골퍼가 좋은 환경에서 골프를 칠 수 있었다는 것은 인생의 큰 행운이었죠. 더 일해 달라는 허 회장님의 요청에 보다 젊고 유능한 프로를 찾는 게 좋다고 했어요.” 허 회장은 어려운 시절 한국 골프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부친(고 허정구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의 대를 이어 KGA 회장을 맡고 있다.

코리안 투어 25승 이상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영구 출전권을 갖고 있는 최 프로는 젊은 후배들에게 대회 출전의 기회를 한 자리라도 더 주기 위해 정규 대회에 출전을 가급적 자제했다. 40년간 투어를 뛰면서 이렇다 할 부상이 없었다는 그는 골프 외에 골프 교습 등 다른 비즈니스를 일절 하지 않았다. 훈련량은 예전보다 줄어든 게 사실이지만 골프를 대하는 열정과 노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보통 대회에 140명가랑이 출전하는데 실력은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모두 우승하려고 대회에 나오는 것 아닌가. 많은 우승을 했지만 그냥 운좋게 얻어진 우승은 한 번도 없었고 모두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었죠.”

골프를 통해 큰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아들 두 명을 가르치고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는 그는 식당을 가거나 쇼핑을 하러 가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불편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행동거지에 늘 조심스럽다. 많은 것을 얻었기에 응당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골프 선수가 되고 싶지 않고 평범하게 살 거라고 웃어 보였다.

스포츠 스타는 자식에게도 같은 길을 가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최 프로는 두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골프의 ‘골’ 자도 입 밖에 못 꺼내게 했다. “평범하고 우승을 못했다면 아이들에게 기대를 해보려고 골프를 시켰을지 모릅니다. 주위를 보면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 같은 대선수들도 자식들이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지요. 아주 예민한 운동인 골프는 유전적인 영향보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공부하듯 외워야 하기도 하고, 죽어 있는 공을 살려서 멀리 보내야 하고, 피말리는 승부의 세계에서 싸워야 하는 게 골프죠. 아빠는 운이 좋아 부와 명예를 이뤘지만 아들에게 힘든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국내 명문대를 졸업해 각각 대기업 직원과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투어를 뛰느라 자식 교육에 큰 신경을 못 썼지만 집사람이 자식농사를 잘 지어주어 늘 고맙게 여긴다고 했다.

2008년 KPGA 수석 부회장으로 활약했던 최 프로는 요즘 국내 남자투어가 위축돼 있어 많은 후배들이 외국 무대로 떠나가는 현상에 가슴 아파했다. 2016년 대회가 13개 열렸지만 내년에는 18개 대회가 열려 그나마 투어 환경이 개선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오죽하면 남자골퍼들이 남녀 평등을 외치겠어요. 원로급인 저를 포함해 KPGA 집행부 등이 더욱 반성하고 노력할 겁니다. 응원을 많이 부탁합니다.” 이와 함께 한국 여자골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후배들이 해외에서 국위 선양을 하고 있음에도 골프를 여전히 사치스포츠로 간주해 골프장에 중과세하는 현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최 프로는 언제 또 우승할 것 같냐는 질문에 “투어를 뛸 수 있는 건강과 체력을 갖고 있는 것만도 행복한 것 아닌가요”라며 활짝 웃는다.

성남=박병헌 선임기자 bonanza7@segye.com

◆ 최상호 약력


△1955년 1월 4일 경기도 고양군 출생 △1977년 9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테스트 합격 △1990∼2014년 남서울CC 헤드프로 △2008년 KPGA 수석 부회장 △소속사 타이틀리스트 △주요 우승 경력 -1978년 여주오픈, 1981년 KPGA 선수권, 1983년 한국오픈, 1985년 동해오픈, 1986년 KPGA 선수권, 1990년 포카리오픈, 1991년 매경오픈, 1993년 팬텀오픈, 1995년 신한동해오픈, 1996년 영남오픈, 2005년 매경오픈 등 정규투어 43승, 2016년 7월 그랜드시니어투어 메이플비치 오픈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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