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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박찬익 애국열정 어린 임정 주화대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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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1-05 22:04:34 수정 : 2017-01-05 22: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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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창춘시에서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신강주(64)씨. 그는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 박찬익(1884∼1949) 선생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1998년 밀입국해 서울 성수동의 염색공장에서 일하던 신씨는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자 2003년에 자진 출국했다. 그 후 한국을 오가며 가족을 찾던 중 그는 경기도박물관이 박 선생 관련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물관 측의 도움으로 신씨는 박 선생 자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신씨의 가족관계를 확인한 법무부는 특별귀화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난해 광복절을 앞두고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박찬익 선생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904년 서울에서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듬해 고향 파주로 돌아와 사립보통학교 통역교사로 지내다가 신민회에 가입했다. 대종교에 들어간 박 선생은 1910년 2월 만주로 망명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대종교 중심의 무장단체인 중광단에 입단했다.

1946년 5월 중경에서 남경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과 박찬익 선생(작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박 선생은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의 ‘조선독립선언서’와는 다른 것으로, 동포들에게 결사항전하여 대한독립을 하자고 외친 것이다.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생기면서 박 선생은 박은식, 신채호, 손정도, 조성환 등과 함께 18명의 평정관(評政官)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길림통신부에서 근무했다.

1921년 상해로 이동한 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었다. 그해 7월에는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뽑혀 정부의 외교임무를 전담했다.

조국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임시정부의 잔무처리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귀국 등 제반문제 처리를 위해 주화대표단이 창설되자 박 선생은 단장으로 임명됐다. 주화대표단은 1947년 1월 1일 한국주화대표단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48년 8월 10일 해산됐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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