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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의 헐벗음에 한없는 추위를 느꼈다. 허름한 이부자리와 깜박이는 낡은 형광등 밑에서는 삶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작품 소식이 끊긴 지 오래인 소설가 양귀자가 1990년 펴낸 첫 장편소설 ‘희망’에 적은 작가의말 한 대목이다.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로 잘 알려진 그이는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삶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썼다. 독한 허무요, 냉정한 관찰이다. 그녀는 나아가 “생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없고서는 세상은 새롭지도, 또 새로움에의 꿈도 꿀 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시대가 괴롭고 어두울수록 그것에 대응할 만한 경쾌하고 따뜻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썼다.

권총을 입에 물고 자살하면서 “한바탕 잘 놀았소. 고마웠소. 그럼 안녕히.”라는 유서를 남기고 간 러시아계 프랑스 소설가 로맹가리는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에서 희망은 치명적인 ‘유혹’이라고 설파했다. 페루 리마 해안의 절벽들은 검은 흙과 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밑 바로 바다 쪽으로 달리는 도로 위의 차들은 교통사고보다도 그 흙들이 무너져 내려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남미의 바다라면 희디흰 태양과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들이 더 전형적인 풍경인데, 유독 리마의 이 해변만은 ‘버려진 바다’라고 불릴 만큼 늘 흐리고 어둡다. 소설 속에서 새들은 태평양 멀고 먼 바다를 죽을힘을 다해 날아와 이곳 해변에서 생을 마친다.

이 해변에서 소설 속 남자는 카니발 끝물에 한 여자가 자살하려는 걸 구해내 막 사랑의 감정이 움트는데 늙은 속물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사라지자 마지막 희망마저 포기한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항독 지하운동도 벌였으며 쿠바에 가서 혁명에도 참여했던, 모든 인연을 끊고 희망을 버린 채 숨어 살던 그 사내는 ‘그 누구도 결코 정복한 일이 없는 유일한 유혹’, 그 희망의 아홉 번째 파도에 다시 휘둘렸다가 절망하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 사라진다.

살아있는 한 희망은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다. 양귀자 스타일로 말하자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야말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희망은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악이라고 말했던 니체는 그것이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희망이 없으면 절망도 없고 강박적인 ‘희망 고문’도 경계할 일이지만, 희망하는 것조차 포기하는 건 창백한 허무일 따름이다. 다시 시작하는 날들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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